"못다핀 중학생, 15명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못다핀 중학생, 15명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7.07.11 14:1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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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천 고깃배 전복사고로 숨진 금호중학생, 위령제 19일 열린다
   40년 전 금남면 용수천 고깃배 전복사고로 고귀한 목숨을 잃은 금호중 15명에 대한 위령제가 오는 19일 열린다.<사진은 사고 당시 전복된 배를 끌어올리는 장면 : 대전일보 제공>

‘못다 핀 꽃, 열 다섯 송이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40년 전 전국을 슬픔으로 몰아넣었던 용수천 고깃배 전복사고. 금호중학교 학생 15명이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떠난 이승의 한(恨)을 뒤늦게나마 위무(慰撫)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오는 19일 오전 10시 세종시 금남면 성덕리 성덕교 현장에서 유가족과 금호중 관계자, 마을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차가운 물속에서 고귀한 생명을 잃은 희생자의 영혼을 달랜다.

이날 위령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정석모 충남지사에게 교량 건설을 지시해 준공을 하게 된 성덕교 용수천 위령비가 있는 곳에서 금남면 황룡리 황룡사 세진화스님의 주재한다.

1978년 7월 20일 아침 8시 30분.

이틀 동안 내린 장마 비로 용수천 수심은 4m로 불었다. 지금 성덕교 아랫 쪽에 있던 다리는 물속에 잠겼고 마침 공주 청벽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민모씨(당시 23세)의 배가 이곳에 정박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물을 건너지 못하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금호중 모의고사 날이었다. 비가 와서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모의고사가 정박 중인 고깃배를 타게 만들었다. 원봉리, 성덕리 학생이 5차례에 걸쳐 16명 씩 무사히 강을 건넜다.

마지막 여섯 번째. 비극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남아있던 학생 19명이 한꺼번에 배에 올랐다. 정원의 4배였다. 남자는 학생 2명에다 선장과 동료 등 5명이었다. 강을 거의 건널 무렵 목표지점 50m를 남겨두고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여학생들은 서둘러 우산을 폈고 내릴 준비를 하는 과정에 배가 기우뚱하면서 전복됐다. 무게 중심이 한 쪽으로 쏠렸다.

   지금의 성덕교 아래 쪽에 위치했던 다리, 비가 많이 오면 잠기는 잠수교였다. 사고가 발생하던 날 연 이틀동안 내린 장바 비로 이 다리가 잠겼고 금호중 학생 15명은 고깃배에 몸을 실었다가 참변을 당했다.<대전일보 제공>

비극의 시작이었다. 15명이 급류에 휩쓸렸다. 아비규환이었다. 살려달라는 외마디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졌다. 15명이 익사하고 남학생 1명을 포함해 4명이 살았다. 금남면 사무소에 임시로 시신을 안치하고 다음 날 살아생전에 그토록 가려고 했던 금호중에서 합동장례를 치뤘다.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다음 날 대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사고현장에는 익사 학생들의 학부모와 인근 주민들이 나와 구조상황을 지켜보면서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오열을 터뜨렸다. 아침밥을 들고 조심스럽게 학교에 다녀오라던 학부모들은 갑작스런 사고에 물가에 나와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발을 구르면서 울부짖었다...15명의 어린 생명을 삼켜버린 계룡천은 황토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사고 보도는 속보로 이어졌지만 잃어버린 15명의 고귀한 생명은 되돌릴 수 없었다.

‘屍體 引揚 때 마다 오열·悲痛 뒤범벅’, ‘模擬考査가 떼 죽음 自招’, ‘當局 사고 예방에 허술, 橋梁 가설 시급’ 등의 제목으로 후속 보도는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당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 소식을 접하고 다리 건설을 정석모 충남도지사에게 지시했다.

절대 권력자였던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사고 현장에서 상류로 1Km 올라간 지점에 길이 200m, 폭 6m 크기의 성덕교가 준공됐다. 그게 ‘15명의 목숨과 바꾼 다리’가 됐다. 성덕, 원봉리 주민들에게는 그렇게 만들어져서는 안 될 교량이었다. 슬픔의 다리였다.

당시 금호중 3학년이던 여동생 옥자씨를 잃은 신승철씨(원봉1리 이장,59)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며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됐고 배만 올라오지 않았어도 사고는 없었을 것”이라고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뒤늦게 나마 위령제를 지낸다니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부모님들은 여전히 가슴이 아플 것 같아 가능하면 위령제에 형제 자매가 참석하도록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슬픔의 여진은 끝이 아니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남학생은 충남대학교 재학 당시 대전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또 하나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호남선 위로 통과하는 계룡육교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우연이었다.

   1978년 7월 20일 아침 8시 30분에 사고 발생을 보도한 대전일보 지면, 대전일보는 후속보도를 이어갔고 박정희 대통령은 다리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용수천 위령비가 세워져 사고 흔적을 알려주었지만 누구도 희생자를 위로할 생각은 못했다. 사고 발생 40년째를 맞아 한 많은 다리 성덕교 재건설 계획이 수립되면서 위령제가 마련됐다. 15명의 목숨과 맞바꾼 다리가 수명을 다하자 위령제의 첫 해가 시작된 것이다. 금남 원주민 청년회가 주관하고 남세종 농협이 후원을 맡았다.

노명진 금남원주민 청년회장(43)은 “성덕교는 그분들의 생명을 바친 다리인데 다리가 없어진다고 해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번에 위령제를 마련했다” 며 “이를 계기로 매년 제를 지내고 돌아가신 분들의 혼령을 달래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세종시는 성덕교 자리에 대형 차량 교행이 가능한 폭 11m 규모의 교량을 85억 원의 예산을 투입, 2019년 초까지 건설할 예정이다. 다리 신축과 함께 떠도는 영혼들은 극락왕생하고 성덕, 원봉 주민들의 아픔이 지역 발전으로 승화하는 아름다운 변신을 기대해 본다.

   15명의 꽃다운 생명과 맞바꾼 성덕교, 세종시는 이 다리를 2019년 초까지 대형차량 교행이 가능한 교량으로 재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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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8-07-24 11:28:04
전에 있던 위령비가 지금은 어디로 옮겨졌나요?
새 다리를 놓으면 위령비도 다시 복구되나요?
아픈 역사이지만 그것도 금호중의 역사이니
새로 생긴 금호중 안으로 옮기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신방현 2018-07-23 19:27:21
기사 내용이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날 아침에는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으며, 배가 정박한게 아니라 이동중에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고, 또한 남자는 남학생 4명과 배운전하시는분 그래서 5명이었고, 나머지는 여학생있습니다. 급류라기 보다는 금강에서 용수천으로 물이 역류 하였으며,
배가 전복된것이 아니라 앞쪽에서 부터 잠겼음.....
매년 위령제를 올리는것에 대해서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지금도 그 참상이 생생합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세종시 문화관광해설사 임재한 2017-07-13 02:00:21
벌써 세월이 한없이 흘러갓네요
저도 그당시 현장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납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위령제를 지내고 영혼을 위로한다니
박수를 보냄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고 먼저 가신 꽃다운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