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 두명은 한참동안 떠 있었어요"
"여학생 두명은 한참동안 떠 있었어요"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7.07.17 16: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수천 참사 목격자 신방현씨, "배가 정박해 있었다는 건 사실과 달라"
   40년 전 용수천 참사는 사실과 다르게 전달된 부분이 있다고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신방현씨가 전화로 알려왔다.<사진은 용수천 위령비와 위령제 안내 프랑카드>

“위령제를 뒤늦게나마 지낸다니 다행입니다. 착찹한 심정입니다.”

집중호우가 세종시 북부지역을 강타한 다음 날인 17일 ‘세종의 소리’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전 월평동에 살고 있다는 신방현씨(56)는 ‘못다핀 중학생, 15명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제하의 기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1978년 7월 20일 사건 당시 고깃배를 타고 용수천을 건넌 후 바로 다음 차례에서 사고가 났다는 말과 함께 기사 내용 가운데 상황을 잘못 전달한 게 있다고 수정을 요청했다.

당시 보도된 기사를 토대로 작성했다는 말에 아무튼 ‘배가 정박해있었다’는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깃배는 강 하류 쪽에서 상류로 올라오고 있었고 학생들이 손짓을 해서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배 삯을 1인당 100원씩 받았다고 기사에 나와 있었으나 옮겨 쓰지는 않았다는 말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선주 민모씨는 좋은 일 하려다가 불의의 사고로 감옥까지 갔다”고 말했다.

배 주인을 제외하고 남학생이 4명, 여학생이 14명이 탔는데 도착지점 20-30m지점에 이르면서 고깃배가 강안에 부딪히는 걸 피하기 위해 시동을 껐다. 이 때 여학생들이 앞 쪽으로 몰리면서 선수(船首)쪽이 물에 잠겼고 전복된 게 아니라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선미(船尾)에 있던 남학생 4명은 배가 침몰하는 걸 보면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3명은 헤엄쳐 살았고 한 명은 여학생에게 잡혀 함께 익사를 했다. 여학생 가운데 2명은 가방을 구명용으로 붙잡고 한참동안 물위에 둥둥 떠다녔으나 발만 동동 굴렀을 뿐 구하지 못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멀지만 돌아가는 길이 있었고 강물이 불어난 건 전날 비가 많이 온 탓도 있지만 금강물이 용수천으로 역류한 게 원인이라고 바로잡아주었다.

이 광경을 신씨는 강 건너편에 먼저 도착해서 목격했다. 같이 붙잡고 숨을 거둔 남녀 학생을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후문도 있었다는 말에 “처음 듣는 소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혼 결혼식은 아래 윗집에 살면서 선후배로서 사이가 남달랐던 고 이병림군과 고 유미희 양간에 올려졌다.  사고 후 3년이 지나서 양가 가족들이 조용한 암자에서 피지 못한 두 영혼을 맺어주었으며 지금도 형 이병국씨와 조카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신씨는 “다리를 그 자리에 건설하는 것이냐”고 묻고서는 “아무튼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위령제를 지낸다니 다행이지만 아쉽다”고 여운을 남겼다.

신씨는 사진 게재 요청에 손사래를 치면서 "사실만 바로 잡아달라"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