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넘쳤다.
애도가 물결을 이뤘다.
40년 전 7월 20일. 피지 못한 꽃다운 청춘, 15명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성덕교 서쪽 다리 끝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애도 속에 열렸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행정수도가 된 세종시의 교육 책임자도 참석했고 시정을 함께 책임지는 부시장, 그리고 시의원, 농협 조합장, 금남면장, 파출소장 등 광역과 기초 단체장 등이 애도에 동참했다.
슬픔이 40년 전과 오히려 더했던 참석자도 있었다. 유가족들이다. 속울음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들은 위령제 말미에 이르면서 끝 내 통곡으로 폭발했다. 모의고사를 치르기 위해 고깃배에 몸을 실었던 금호중학생 15명은 ‘성덕교’라는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남긴 채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났다.
이제 그들은 50중반의 나이. 또래는 부시장이 되고 동창회장이 되어 천지개벽을 한 세종시 금남면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은 만장에 이름 석자를 올린 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다.
19일 오전 10시 세종시 금남면 성덕교 서쪽 편. 40년 전 용수천을 고깃배로 건너다 목숨을 잃은 금호중학생 15명의 영혼은 스님의 독경소리로 다시 찾아왔다. 전동면 송학사 금담, 신종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날 현장을 기록한 대전일보 사진과 기사는 오래된 기억을 슬픔 속에 되살려주었다. 고작 대여섯명만 타도 중심을 잃을 것 같은, 말 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 사고 후 그걸 끌어올리는 사진은 참혹한 현장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희생자 15명의 흐릿한 사진은 “아이구! 맞다”는 말끝에 울음으로 이어졌다.
풍물패가 초혼(招魂)을 하자 참석자들은 묵념으로 희생자들을 영령을 맞았다. 내빈 소개니 대회사는 차라리 거추장스러웠다. 위령제를 준비한 노명진 금남면 원주민 청년회장은 “이곳에서 수마에 휩쓸려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며 아주 짤막하게 대회사를 마쳤다.
금호중 출신 강준현 세종시 정무부시장은 “장마로 불어난 용수천을 건너다 희생한 학생들로 인해 건설된 성덕교는 그동안 아픈 기억을 담고 건너던 다리였다” 며 “다시는 이런 사고가 세종시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예비군 중대장으로 “책가방만 둥둥 떠 있었다”고 회고한 임상전 세종시의원은 철조망으로 시신과 유품을 수거했던 상황을 설명, 또 한번 이곳 저곳에서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리게 만들었다.
세종시 교육을 책임지는 최교진 교육감은 말 그대로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영령들을 애도하며 결코 보낼 수 없었던 넋을 가슴에 묻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께 깊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는 고귀한 생명을 내어주고 놓여진 성덕교는 학생들과 주민들이 안전하게 다니게 해 준 고마운 다리였지만 오갈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슬픔의 다리였다며 “안타까운 희생에 슬픔과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어이없는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 세월호의 아픔도 떠올렸으리라.
명복을 빌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회한과 다짐이 반복되는 동안 유가족들은 여전히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다. 급기야 “둘만 있었어도...”라며 먼저 떠난 딸을 떠올리면서 터뜨린 오열과 통곡은 좌중을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웃음이야 당연히 없었지만 그렇다고 박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행사는 비할 바 없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금호중 신언권 총동문회장이 강신갑 시인이 쓴 추모시를 읽었다.
성덕교 위령제에 부쳐
귀천하신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꽃 다우신 님들이시여 슬픔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오니 이 무슨 처참한 운명입니까.
보잘 것없는 예를 갖추어 설움 맺힌 원통함을 아뢰옵니다. 용수천의 물결은 줄기차게 흘러 마르지 않고 유개산은 말없이 지켜서서 푸르름이 닳지 않을 것이니
아, 이 산천과 더불어 마르고 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님들의 애틋한 청준과 넋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 염언 짧으나마 간절히 고하오니 받아주시옵고 극락왕생 천국에서 영생복락 향유하소서, 향유하소서.
이윽고 이병국 유가족 대표가 위령제 준비한 청년회와 참석 내빈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남학생으로 유일하게 희생된 고 이병림의 바로 윗 형이었다. 위험한 나룻배를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다 마지막 배에 올라 돌아오지 못한 곳을 떠났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을 하루라도 먼저보기 위해 떠난 부모님, 고운 색깔을 입지 않는 살아남은 자의 신독(愼獨), 박정희 대통령에게 요청한 ‘억수장마가 져도 잠기지 않는 튼튼한 다리’, 유족 생각에 손을 떨며 썼던 부친의 ‘성덕교’ 교각명, 금남면 청년회원들의 붉은 마음 등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가슴으로 조사(弔辭)를 읽었다. 글로 쓴 곡(哭)이었다.
이윽고 “40년, 실로 오랜 만에 고인이며 먼저 가신 동생들의 물방울 같은 이름을 아비, 어미, 오라비, 언니를 대신하여 목 놓아 다시 한번 불러본다” 며 “주곡 윗 말사는 신재순... 큰 마당 사는 신미숙, 행정사는 양길자, 황새봉 사는 유미희, 번개 학교 밑 사는 안정례...토끼 샘골사는 성순덕”에 이어 맨 마지막에 열여리 사는 청일점 동생 이병림을 목놓아 불렀다.
죽음이 슬프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피지 못한 꽃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야 어디에 비길 수 있을까. 인명은 재천으로 슬프디 슬픈 이별을 합리화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40년 전 그 아픔은 위령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그게 산 자의 슬픔이었다. 영령이시여!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