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金子 文子, 1903~1926)를 아십니까.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의 연인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조국인 일본에 저항하고, 조선을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본의 극악무도한 식민지 통치에 대항했다. 박열과 함께 일본 천황 암살을 시도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다. 일본 측에서 봤을때는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인 셈이다.
그녀가 세종시 부강면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후미코는 유년시절 부강심상소학교(부강초등학교 전신)를 졸업했다. 당시 부강은 210여 명의 일본인이 살았고, 매일 7천여 명이 드나드는 상업이 매우 번성한 곳이었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부강에서 살았던 7년여의 시간은 그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경험했던 3.1운동과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폭악성은 그녀 특유의 반항적 기질, 조선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 무장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학계는 보고 있다.
후미코는 1919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아나키스트가 됐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으며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 했다. 1923년에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6년 그녀는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내에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
일본 천황 암살을 시도해 재판에 회부될 당시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고 재판 내내 조선어를 사용했다. 일본인인 후미코 역시 조선의 예복을 입고 박열과 함께 조선을 위해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불살랐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 쳤습니다." (재판기록 중)
그녀는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받는 과정에서 이같이 진술했다.
이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23살의 나이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 결혼을 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경북 문경에 안장했다.
후미코의 기일인 7월 23일 문경에서는 추도식이 열린다. 일본과의 교류도 이어지고 있다.
후미코와 가장 가까운 혈육인 외가쪽 친조카 가네코 타카시(金子敬, 71) 씨는 지난달 부강초등학교를 찾아 후미코의 뜻을 기렸다. 그는 현재 일본 야마나시현 소구마치에서 후미코의 생가와 시비를 관리하고 있다.
부강초 동문들은 후미코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미코가 살았던 집터와 당시 일본 헌병대 자리(현 부강파출소) 등 곳곳을 함께 둘러봤다.
이날 참석했던 세종시 향토사연구원들은 '가네코 후미코'가 세종시의 스토리텔링 문화관광자원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