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 독립유공자로 우뚝 서다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 독립유공자로 우뚝 서다
  • 송두범
  • 승인 2019.01.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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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세종아리랑...부강에서 자라 박열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
묘소가 있는 문경시와 자매결연 등을 추진, 업적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삶을 조명하는 계기 필요
가네코 후미코

박열(朴烈) 의사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일본의 천황제에 반대하는 아니키스트(Anarchists)로 살다 23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죽었다. 2018년 국가보훈처는 일왕 암살을 계획했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에게 사후 92년 만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박열의 지원자로서만 그 역할이 알려졌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한 사람의 독립유공자로서 당당히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県)현 요코하마(橫浜)에서 1903년에 출생하였다. 출생 이후 아버지가 그녀를 입적시키지 않아 무적자(無籍者)로 친척집을 전전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이후 고모의 양녀로 들어가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당시,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서 약 7년 동안 모진 학대를 당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그 해 일본으로 돌아와 여러 사상가들과 교우하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1922년 3월 도쿄에서 박열을 만난 뒤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항일 운동에 투신, 필명 박문자(朴文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면으로는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을 도와 의열단(義烈團)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대역죄(大逆罪)로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1926년 7월 23일, 자유를 찾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후미코의 죽음에 대해 형무소 당국은 자살 일시 및 자살 수단 등을 오늘날까지 비밀에 부처 실상을 확인할 수 없다.

후미코 사후 형무소공동묘지에 묻혔으나, 그녀의 아버지 등이 사체를 발굴하여 화장을 했고, 박열의 형 박정식이 유골을 인수하려했으나, 이케부쿠로경찰서에서는 문제가 있는 유골이라 잘못되어서는 안된다는 우려에서 상주경찰서로 소포로 보냈다.

후미코의 유골은 1926년 11월 5일 남편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북쪽으로 약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문경읍 팔령리 산중턱에 묻혔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혀졌다.

그 후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2003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팔령의 산속에 있던 가네코 후미코 묘소를 박열의사기념공원 경내로 이장하였다.

가네코 후미코와 세종은 어떤 인연일까?

후미코는 일곱 살이 되어서도 소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호적에 올리지 않은 무적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적인 채로 일본에서 소학교를 전전하게 되었고, 1912년 조선에 살던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세종시 부강면으로 떠나게 된다. 후미코의 고모인 가메는 아버지의 여동생으로 고모부인 아와시타와 결혼했고, 조선에서 철도보선주임일을 하다 퇴직하여 부강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것이다.

후미코는 1912년 12월 11일 부용면 부강심상소학교 4학년으로 전입하였으며, 당시 전교생 수는 45명이었다. 후미코가 5학년으로 진급한 여름에 학교는 공립이 되었으며 고등과도 생겼다. 후미코의 할머니는 대단한 권위주의자였기 때문에 후미코가 이웃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이와시타가 사람들의 인색함도 후미코를 괴롭혔다. 후미코는 12, 13세부터 하녀와 다름없이 부엌일을 떠맡아야 했다. 후미코가 부강에 머물렀던 7년 동안 이와시타가에서 용돈 10전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을 정도로 부강에서의 생활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후미코는 부강의 자연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태산에서 밤을 줍기도 하고, 산 정상에 올라 부강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보기도 하며, 백천(금강) 건너편 부용봉(芙蓉峰)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내가 정말로 살아 숨 쉬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라고 회상하였다.

후미코는 할머니와 고모의 구박에 못 이겨 죽음을 생각했고 실제 금강에 투신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아름다운 부강의 자연과 ‘나처럼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에 자살을 포기하였다.

후미코가 가장 깊은 동정을 드러냈으며, 그녀의 인상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1919년 3.1운동이었던 듯하다. 김일면은 ‘후미코의 조선체험이야 말로 그녀가 반역여성이 된 근원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고마쓰 류지는 ‘후미코의 조선생활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후미코의 사상형성과 생활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바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부강에서의 삶을 통해 조선의 고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일본제국에 항거한 아나키스트로 성장했던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 정부는 일제에 항거하고, 조선민중에게 혁명적, 독립적 정열을 자극한 그녀의 공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세종시에서도 후미코의 부강면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연구하는 시민이 있고, 그녀에 관심을 가진 언론사가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경북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 사진 출처 :  문경시청 블로그
경북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 사진 출처 : 문경시청 블로그

영화 ‘박열’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 일제에 항거한 그녀의 세종생활에 대해 더 많은 세종시민들과 미래세대가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우선, 가네코 후미코의 세종생활에 대한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녀가 생활했던 부강의 여러 장소를 연결하여 (가칭)가네코 후미코의 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중장기적으로 부강면에 가네코 후미코 기념관 건립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과 그녀에 관한 서적을 토대로 연극, 음악, 뮤지컬, 무용 등 문화예술작품 창작이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후미코의 남편 박열의사의 고향이자 그녀의 무덤이 있는 문경시와 세종시간 자매결연, 또는 문경시 마성면과 세종시 부강면간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그녀의 삶과 사상에 대한 학술 및 문화교류, 그녀를 기리기 위한 공동행사의 개최를 제안해 본다. 가네코 후미코의 세종생활과 그녀의 사상은 분명 세종시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송두범, 영남대 졸업, 행정학 박사(지역사회개발전공), 충남연구원 정책사업지원단장, 행정도시완성세종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및 지역위원장,
이메일 : songd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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