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강은 일제 잔재, 동진강으로 불러야 옳다
미호강은 일제 잔재, 동진강으로 불러야 옳다
  • 윤철원
  • 승인 2022.09.02 17:45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철원칼럼] 환경부 미호강 고시 유감, 동진강으로 바로 잡아야...
행정수도 세종 이르는 강 명칭, 고유명버리고 일본 잔재써야할까
환경부에서 일제 명칭인 미호강으로 고시한 이 강은 동진강으로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환경부에서는 지난 7월 7일자 관보에 미호천(美湖川)을 미호강(美湖江)으로 변경한다고 고시하였다.

1910년대 미호천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지 110여 년 만에 천(川)이 강(江)으로 격상되었으니 반가울 법도 하지만, 동진강(東津江)이라는 이름을 외면하고 미호강으로 고시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東津)은 연기현 관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진천현의 두타산이요, 하나는 청주의 적현(赤峴)이고, 하나는 전의현이다. 이 물이 남쪽의 공주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김정호가 저술한 대동지지에는 “동진강은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청주의 부탄(浮灘) 하류로서 용당을 지나 금강 나리진으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와 동여도, 그리고 1872년 연기현 지도 등에 동진강이라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러한 문헌들만 살펴보아도 조선시대에는 이 강을 동진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진강에 대한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33년 미호천 제방이 축조되면서 예양리, 송용리, 문주리 일대에 조성된 400여 ha의 농경지를 동진들 또는 동진평야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큰 신발을 “동진강 나룻배 만하다.”라고 비유하는 우스갯소리 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임진왜란 당시 연기현 동진평(東津坪)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임진년 6월 23일 왜군에게 청주성을 빼앗긴 방어사 이옥은 연기현 동진평에 진을 치고 절치부심 탈환을 도모하다가 8월1일 영규대사, 조헌 선생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후 육지전에서 첫 번째 승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동진평이 그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연기현 지도에는 '동진강'으로 명기하고 있고 '동진 나루'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연기팔경(燕岐八景) 중 동진어화(東津漁火)라는 한시는 여름밤 동진강에서 횃불을 들고 물고기를 잡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휘도는 긴 강, 십리 넘는 듯 / 一帶長江 十里餘

들녘사람 취미는 고기 잡는 버릇일세. / 野人淸趣 癖於漁

저문 달은 물 닿은 하늘가에 걸렸는데 / 第看月落 汀空夜

횃불 들고 오고 감은 별빛 같아라. / 炬火縱橫 星火如

장기항(張基恒)의 동진어화(東津漁火)

세종시 합강리(合江里)는 두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는 지명인데 동진강과 연관이 있다. 경기도 양평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곳을 두물머리 또는 양수리라고 부르고 있으나, 우리 고장에서는 동진강이 금강에 합쳐지는 곳이라 하여 합강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세종시 지역에서는 동진강이라는 명칭이 유구한 세월 동안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어떠한가?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탄하고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명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때 작성한 ‘조선지지자료’를 바탕으로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 변경자료로, 그리고 식민지 수탈 자료로 활용하였는데, 미호천이라는 명칭도 이 자료에서 처음 등장한다.

미호천은 충북 음성군에서 발원하여 세종시 합강리까지 약 89km의 길이에 유역면적이 1,890㎢에 이르는 국내 열한 번째 강인데, 조선시대에는 이 강의 지역별 명칭이 각각 달랐다.

동국여지승람에 표기된 '동진'

진천현에서는 주천(注川), 청안현에서는 반탄(磻灘), 청주목에서는 작천(鵲川), 진목탄(眞木灘), 망천(輞川), 부탄(浮灘), 연기현에서는 동진강(東津江)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했던 강 이름을 1910년대에 일제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던 미호천(美湖川)으로 작명한 것이다.

미호천의 어원은 과거에 나루터였던 세종시 연동면 미꾸지 마을에서 유래하였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5∼6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미곶진(彌串津)으로, 1899년 연기군 지도에는 미곶진(美串津)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제 초기에는 미호(渼湖, 尾湖, 美湖)라는 다양한 한자 지명으로 사용되다가 1910대 중후반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 미호천(美湖川)으로 표기된 이후 다른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관민이 합동으로 왜군을 공격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던 청주성 전투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청주를 지나는 국내 11번째 규모의 큰 강을 천(川)으로 그 격을 낮추었을 것이다.

또 조선 관군과 승병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했던 동진평에 대한 곱지 않은 감정도 동진강을 버리도록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한데, 그렇다면 일제가 의도적으로 미호천이라는 명칭을 작명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제의 잔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동지지에 남아있는 '동진강', 왜 미호천을 미호강이라 고시했을까

그러므로 정부에서 미호천 명칭을 변경하고자 하였다면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과 정황을 살펴보고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했던 것인데, 그러한 고찰이나 고민이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미호강으로 결정함으로써 뜻있는 사람들의 탄식과 질책을 자초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이제라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민간이 뜻을 모으는 과정을 거쳐, 우리 선대가 사용하던 동진강으로 그 명칭이 변경·고시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미호-여우꼬리인줄 2023-04-21 11:03:57
이런 사연있는 강인줄 이제 알았네요.
음... 엄마~ 왜 형만 사주고 난 안사줘! ...처럼 어린애 같은 편협한 사고입니다. 비유가 딱 100프로 부합하진 않는데... 한가지 논리만 생각지 마시고 여러가지 상황을 함께 생각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일본/미국으로 단순비교후 무슨 불평등 주장하듯 말할수 없다고 봅니다.

이은실 2022-09-03 07:14:52
너무 편협된 주장입니다. 왜 일본은 안 되고 미국은 되나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현재 일제 잔재가 아닌 단어가 얼마나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