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 덕분에 고국 아이들 생각하게 됐습니다”
“임영웅 덕분에 고국 아이들 생각하게 됐습니다”
  • 문지은 기자
  • 승인 2022.08.18 09: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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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매년 3회 후원 약속한 수 테일러씨 전화 인터뷰
20대 미국 유학, 고위공무원 평생 봉직… 루게릭병 투병하며 기부 실천
임영웅 '찐팬'으로 생일, 데뷔일 등 기념이 되는 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와 나눔을 위해 실천한 수 테일러씨 씨가 인터뷰용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했다.

트로트의 영웅, 임영웅의 ‘찐팬’인 미국 국적의 수 테일러 여사(78).

그는 자신의 우상의 생일이나 데뷔 날에 한국의 위기 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임영웅의 이름으로 기부를 해 화제가 되고 있다. 올해 3월에드 그랬다. 1000달러를 기부하고 작은 돈이지만 가치있게 써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떤 사람인지, 왜 그렇게 하는지, 지금의 상황 등등이 궁금했다. 

8월, 다시 임영웅 6주년 데뷔 기념으로 2,000달러를 기부했다는 소식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세종본부 측에게서 전해듣고 이번에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에 사는 수 테일러 씨에게 전화연락을 시도했다.

그는 TV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에서 노래를 하는 임영웅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데뷔 직후부터 남을 돕는 것을 보고 동참을 결심했다는 것. 

한국계 미국인으로 로드아일랜드에 살면서 매년 정기적으로 본인 이름도 아닌 임영웅으로 기부를 하는 할머니는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루게릭병 투병 중이라 거동도 불편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목소리는 힘이 넘치고 밝았다. 사진 전송을 몇 차례 거절했다가, 간곡한 부탁에 아들이 찍은 최근 사진을 보내왔다. 

미국에 언제, 무슨 사연으로 갔는지부터 전화로 물었다. 

- 미국은 언제, 무슨 일로 갔나?

“대학교 1년을 마치고 21세 때 미국으로 강제유학을 왔어요. 아버지가 판사였고 저를 법학과에 진학시켰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음악 콘테스트에 나가서 우승을 했어요. 그 후에도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음악경연대회도 나가고 노래를 부르며 배호를 비롯해 한국 가수들과 교류를 나눴죠. 아버지가 이를 알고 강제로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보내셨어요.”

1960년대 미국 유학을 가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지만 수 테일러 씨는 한문과 일본어는 익숙했다. 하지만 영어는 한마디도 모르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노래와 그림을 좋아하는 재능있는 소녀였지만 당시 부모님은 ‘딴따라’라며 음악을 천시했고 노래에 재능을 보이는 딸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시 배호를 비롯해 유명한 작곡가와 가수들과 교류하던 수 테일러 씨는 미국에서도 한동안 한국 가수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계속해 나갔다고 했다.

- 어떻게 세종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나?

“어느 날 한국 방송을 보는데 임영웅씨가 ‘미스터트롯’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니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임영웅씨의 팬으로 열심히 활동했지요. 임영웅씨는 데뷔 초기부터 어려운 이웃도 많이 돕는데 저도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임영웅씨를 보고 한국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마침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박미애 본부장을 알게 돼, 세종시 어린이들이 꿈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임영웅씨 생일이나 데뷔 기념 등 특별한 날에 기부를 하게 된 거예요.”

- 미국에서의 생활을 간단히 말해달라.

“미국 대학에 다니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게 됐어요. 남편도 공무원이었는데 남편의 권유로 공부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무원이 됐지요.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해군대령이고 하나는 변호사에요. 미국에서 나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요. 미국에서도 평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와 나눔을 해 왔는데 임영웅씨 덕분에 한국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평소 노래뿐 아니라 그림 그리기도 즐겨 하는 수 테일러 씨는 민화와 비슷한 화풍의 그림을 그려 성당에서 하는 바자회에 그림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사진은 수 테일러 씨가 그린 그림들.

수 테일러 씨는 미국에서 60년 가까이 살면서도 집에서 직접 장을 담그고 김치와 장아찌를 담아 한국식 생활을 해 나갔다. 평소 한국 노래도 자주 듣고 자녀에게도 한국말을 가르치니 미국에서도 높게 평가받는 인재가 됐다고 했다.

“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당시 미국 백인 사회에서는 한국인이 인종차별을 받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실력을 키우니 인정을 받았지요.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어요. 뼈가 녹으며 고통스럽고 거동이 불편해지는 병이지요. 너무 속상해서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어요. 그러다가 임영웅씨를 알게 됐지요. 고통스럽다가도 임영웅씨 노래를 들으면 아픈 것이 사라져요. 최근에 나온 ‘인생찬가’와 ‘아버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많이 울기도 했지요.”

젊었을 때는 미국에 강제 유학을 보내버린 아버지를 원망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가보지 못했다는 수 테일러 씨는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임영웅 팬이 된 이후에는 자택 파티룸에 노래방기계를 마련해 임영웅 노래를 따라부르며 병마의 고통을 잊게 된다며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임영웅 이름으로 작은 기부를 시작했다.

생일, 데뷔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 그에게 선물을 보내기보다 그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풀어 그의 선한 영향력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2년 전 아들과 함께 부산 여행을 왔을 때 근처에서 임영웅 공연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때 보지 못해, 이제 임영웅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더는 없는데,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었죠. 하지만 늘 임영웅씨 이름으로 기부하고 매일 아침 그의 사진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받아요. 남편과 아들들은 저를 임영웅한테 빼앗겼다고 농담삼아 말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임영웅씨가 멀리 미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고 있는지 알리고 싶어요.”

수 테일러 씨는 매일 임영웅씨의 사진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삼는다며 기자에게도 몇 장 보내줬다. 그는 임영웅씨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지 알게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 테일러 씨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며 처음엔 인터뷰를 고사했었다.

그러나 작은 실천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 세종시의 기부문화 확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인터뷰에 응했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할 수 있는 만큼 나누면서 살고 싶어요.”

수 테일러 씨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세종본부에 매해 세 차례 이상은 죽을 때까지 기부하겠다고 다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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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애 2022-08-19 23:20:08
고국을 잊지않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예쁘고 감사합니다. 오래토록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