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택섭 대영이용원 사장은 조상 때부터 살아온 용포리 121번지에서 출생하여 금남초등학교와 금호중학교를 나와 명문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강 사장은 바로 공무원 시험을 보고 당시 대전시 선화동 충남도청 옆에 있는 농어촌공사 전신인 수리조합연합회에서 1년 6개월을 근무했다.
하지만 당시 월급이 너무 적어 직장을 그만 두고 몇 년간 놀면서 선친이 현재의 건물에 종업원을 두고 이발소를 차려서 사업이 잘 되는 것을 관망하고 있다가 이발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직접 경영에 나섰다. 이발업이 잘 될 때에는 종업원을 4명이나 두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발소는 사양산업이 되고 미장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발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매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커다란 난로, 그리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면도거품, 물조리개 등이 추억 속에 떠오른다. 대영이용원에도 바리깡(머리깎는 기계의 일본말)만 사라지고 대부분 남아있었다.
취재를 간 날 오전에 두 명의 손님을 받았던 대영이용원은 오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바람을 쐬기 위해 잠시 이용원을 비웠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대영이용원에는 이발과 상관 없이 하루 평균 10여 명의 동네 친구들과 지인들이 찾아와 놀고 간다.
“5년 전에 고향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일본 대마도에 구경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바라보니 조그만 동네 이발소가 눈에 보이고 머리가 하얀 노인이 이발소 앞을 열심히 청소하는 있었습니다. 동업자라는 기분에 반갑기도 해서 바로 그 곳에 가서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80세의 나이로 이발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어 장인정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개선되었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차별을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강 사장은 젊어서부터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이발업을 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대영이용원은 그동안 여러 차례 매스컴에서 취재를 요청했으나 강 사장 자신이 내놓을 게 없다고 극구 사양한바 있다.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는 이발소를 사람들에게 기억시키고 싶다는 기자의 간청으로 강 사장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어릴 적 아버지 손잡고 다녔던 동네 이발소가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통 이발소는 이제 역사가 되고 있다. 이발 도구는 물론 거품으로 면도를 해주던 그 때 그 시절 면도방법까지, 지난 47년 간 옛 방식을 고수하며 이발소의 명맥을 이어 온 대영이용원은 2014년 4월 7일 문을 닫고 그곳에는 건평 50평짜리 3층 건물이 들어선다.
강택섭 사장 일가는 금남초등학교에 4대가 다닐 정도로 금남면 토박이이다. 원래 발산리에 신촌 강씨 집성촌이 있었을 정도로 강씨들이 많이 살았다. 강 사장의 선친 강내홍씨가 금남초등학교 11회이고 강택섭 사장이 31회이며 강 사장의 장남 강목씨도 금남초를 나왔고, 손자 강세형(금남초 3학년) 강승현(금남초 1학년) 형제도 현재 다니고 있다.
동네 후배인 오공식씨(71)는 ‘강 선배는 초지일관하시는 분으로 동네에서 착실하기로 소문난 분이어서 많이 의지가 된다“고 말했다.
“젊어서는 이발업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 적도 많았다”고 회상하는 강 사장은 “이제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 건강관리에 힘쓰고, 좋은 친구들과 자주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존경합니다.
추억속 한켠에 소중히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머~~찐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