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수 장군 기개, 세종시에 '가득'
임난수 장군 기개, 세종시에 '가득'
  • 임영수
  • 승인 2011.12.22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수칼럼]<1>세종시에서 만난 세종...용의 물

   세종이 초수로 안질을 고치는 내용의 연극 '왕의 물'의 한 장면
연기군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이는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현 정부가 추진하는 커다란 국책사업이다.

처음에는 「신행정수도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다가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헌법 소원을 내자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판결을 내렸고, 현 정부가 뒤로 물러 설 수 없다고 추진된 것이 행정중심복합도시이다.

신행정수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와의 차이점은 청와대가 이곳으로 옮겨 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점이다. 즉, 청와대가 오게 되면 나라의 수도가 옮겨지는 것이고, 청와대가 오지 않으면 행정기관다수가 이곳으로 옮겨져서 청와대가 옮겨 올 때까지 그 도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기군은 한낮 작은 시골 군에서 대한민국의 중심 군이 되는 것이니 오래 살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이 책자는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연기군에 건설되면서 연기군이 도대체 어디인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들어서는 연기군 남면, 동면, 금남면 지역에는 어떠한 문화유적이 있으며 역사, 지리, 문화와 지명유래, 전설 등을 알려주기 위한 책자이다.

이는 쉽고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필자의 둘째딸 임재영(쌍류초등학교 6학년)과 그 지역을 돌아보는 기행의 모습과 문답의 형태로 꾸몄다.

먼저 기행을 떠나기 전 딸 재영이에게 행정중심복합도시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으며, 때마침 건설청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이름을 공모한 결과 「세종시」로 결정 되었기에 첫 번째 질문이 왜 세종시로 되었나였다.

재영 :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세종시로 되었다고 TV에서 말하던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빠 : 응, 그동안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앞글자만 따서 “행복”도시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정식명칭이 아니었고, 이번에 국민공모를 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세종」이란다.

재영 : 「세종」이라고 한 이유가 있나요?

아빠 : 세종대왕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지?

재영 : 한글을 만드신 왕이셨지요.

아빠 : 그래,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여 우리역사에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신분이며,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업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창조하신 분이시지.  세종대왕께서 하신 일을 몇 가지 알려줄까?

재영 : 네, 알려 주세요.

아빠 :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4번째 왕으로 1397년 4월 10일에 태어나 1450년 2월 17일 날 돌아가셨지.

세종께서는 백성을 우선 생각하는 민본정치를 펴셨는데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의정부(議政府)의 독주를 견제 하였고 1420년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등의 청백리(淸白吏-깨끗하고 맑은 마음과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를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지. 또한,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최항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교육, 서적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어.

   '왕의 물'을 퍼서 나르는 파발마

가장 큰 업적인 한글을 창제하기 위하여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최항 등으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도록 하였지. 또한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정교하고 아름다운 활자를 만들어 많은 책을 찍어내게 하였어.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나 궁궐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려들을 뽑는 과거인 승과제도(僧科制度)를 허락 하는 등 불교발달에도 도움을 주었어. 음악에 관심을 기울여 관습도감(慣習都鑑)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어.

역사책을 보관하기 위하여 춘추관(春秋館), 충주(忠州), 전주(全州), 성주(星主)에 4대 사고(史庫-책을 보관하는 곳)를 설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았어.

과학기술업적으로는 이천(李蕆)과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비오는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 하게하여 1639년 이탈리아의 B카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었지.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 기구를 비치하게 했고,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을 발명 하였어.
당시,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지만 높은 벼슬을 주어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지.

경제, 사회, 정책면은 공법상정소(貢法上程所)를 설치하고 각도의 토지를 비옥하고 척박한 것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하였고,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조절하여 내게 하니 백성들이 좋아 하였지.또 의창(義倉)의료제도,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 하였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를 개선하였고, 사형을 금지토록 하였어.

외국과의 관계에서는 명나라에 처녀를 바치던 것을 폐지하고 금(金), 은(銀)으로 바치던 조공물(朝貢勿)을 말(馬)과 옷감(布)으로 대신 보내도록 하였지.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하게 나가거나 부드럽게 타이르는 양면책을 썼으며,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게 하였어.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는 쓰시마섬에 사는 왜구가 약탈을 해가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여 다시는 약탈 행위를 못하게 하였지. 그러니까 세종대왕은 민족의 역사에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마련하신 성군 이셨어.

재영 : 그런데 연기군에 건설되는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세종」이라 한 이유가 있나요?

아빠 : 콕 집어서 이것 때문에 「세종」이라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세종대왕과 연관된 내용이 많은 곳이 연기군이란다.

재영 : 우리 연기군과 세종대왕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요?

아빠 : 그래, 잘 들어 보아라.
첫째, 우리 연기군이 아니었다면 한글 창제가 어려웠을 거야.

재영 : 예!(놀라면서)
우리 연기군에 그런 사실이 있었어요? 빨리 알려주세요.

아빠 : 전의면에 가면 관정리에서 매년 왕의 물 축제를 개최하지.

재영 : 예, 저도 몇 번 가보았어요.
아빠께서 사회를 보셨잖아요.

아빠 : 그래, 그 약수를 「왕의 물」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세종대왕과 연관되어 그리 부르는 것이란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위하여 많은 책을 보았으며 그 때문에 눈이 나빠졌고, 결국 앞을 잘 못 보는 상태까지 갔지. 왕이 되기 전부터 허약한 체질인 왕은 운동을 하지 않아 비만에다 피부병이 있었고, 특히 눈병은 가장 괴로운 병이었어. 다른 병은 온양에 있는 온천으로 어느 정도 치료를 하였는데 눈병은 더욱 심해졌지. 왜냐면 뜨거운 온천으로 치료하면 눈이 더욱 나빠지거든. 그때가 1437년이니 세종께서 왕성하게 활동 하실 때였어.

   불사이군을 실천한 임난수 장군 묘

1441년 정월에는 왼쪽 눈이 실명할 정도가 되어 어두운 곳은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눈병이 심해지자 온양과 강원도 이천의 온천으로 치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날로 심해지자 정사(政事-나라를 다스리는 일)를 친히 다스릴 수 없다하여 첨사원(詹事院)을 두고 세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려고하자 대신들이 울면서 반대를 하였지.

1443년에는 한글창제를 위하여 언문청을 설치하고 연구에 몰입할 때 전의에 사는 노인이 궁궐을 찾아와 전의 관정리에 있는 신비의 약수가 있으며 눈병에 특효라고 아뢰었어. 이를 초수(椒水)라 부르며, 청주, 목천, 전의 세 곳에 있다고 했지. 세종대왕은 기뻐하시며 노인에게 목면 20필을 선물로 주고 우선 가까운 청주 초수에 눈병이 난 사람을 보내어 임상실험을 하니 눈병에 특효가 있다하여 그곳에 행궁을 짓게 하고 납시어 치료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낳은 듯 하였으나 원상태로 돌아가자 다음 약수를 알아보라 하였지.

두 번째로 전의 초수였어.
그 곳에도 사람을 보내어 치료한 결과 청주보다 더 효험이 있어 왕은 전의에 행궁을 짓도록 명을 내렸어.
행궁을 짓기 위하여 터를 닦고 재목을 옮기는데 왕은 행궁 짓는 것을 중단 시켰어. 그 이유는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힘들어하는데 임금이 많은 비용을 들여 행궁을 짓는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지. 세종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였기에 공사를 중단케 하고 대신 그 물을 궁궐로 떠올리라고 명을 내렸어.

전의에 있는 약수는 우물에서 물을 떠서 시간이 흐르면 물속의 가스가 날아가 약 효과를 내지 못하기에 전의에서 떠서 궁궐까지 옮기면 이미 약 효과가 빠진 맹물에 불과 하기 때문에 곤란하였지.

전의에서 궁궐까지는 걸어서 열흘이고, 말 타고 3일이 걸리니 약 효과를 내려면 해가 질 무렵 물을 떠서 동이 틀 무렵까지 궁궐에 도착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으로는 6시간 내에 도착해야 했어. 그런데 이런 초특급 운송작전이 성공을 거두었어. 전의에서 궁궐까지 몇 개의 역을 선정하여 이곳에 가장 잘 달리는 말을 2필씩 주고, 말을 가장 잘 모는 사람을 압직(押直)이라 하여 3명씩 배치하고, 성실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 2명을 선발하여 감고(勘考)라 하여 물을 뜨게 하였어.

이는 왕의 물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 감고가 저녁에 물을 떠서 마개를 봉한 뒤 서명을 하여 말에 실으면 압직은 손살같이 달려 다음 압직에게 넘겨주고 그렇게 하여 동이 트기 전에 궁궐에 도착하면 그 물로 마시고 눈을 씻으면 낫는 것이었어.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고, 세종대왕은 매일 아침 전의 약수를 마시면서 치료한 결과 1445년 4월 13일 영의정 황의, 좌의정 신개, 우의정 하연, 좌참찬, 이숙치, 우참찬 정인지가 와서 문안 인사를 올리니 세종께서 병이 다 나았다고 기뻐 하셨지. 그러기에 1446년 9월에 한글(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되었어. 그러니 전의 약수가 없었으면 세종대왕께서 과연 한글창제를 무사히 마치었겠니.

재영 : 아빠 말씀을 듣고 보니 전의 약수가 왕의 물이라 부르게 된 이유를 알겠어요.
그리고 연기군에 태어나고 자란 것이 자랑스러워요.

아빠 : 그 뿐만이 아니란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는 지역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연기군 남면 진의리, 양화리, 나성리, 종촌리 일대에는 부안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단다.

재영 : 아빠 우리도 부안임씨잖아요.

아빠 : 그래, 우리도 부안임씨 전서공파의 자손이지.
부안임씨 전서공파의 시조는 임난수(林蘭秀)인데 고려말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의 벼슬을 지내셨지.

재영 : 공조전서가 얼마나 높은 벼슬인가요?

아빠 : 공조전서는 오늘날 건설부장관과 같은 직책이란다.
그런데 우리 조상이신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장군과 세종대왕과의 관계가 있단다.

임난수 장군은 고려의 충신으로 최영장군과 탐라(지금의 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
싸움도중 팔이 한쪽 잘리었는데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계속 싸워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 길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금강을 따라 내려가다 전월산을 바라보니 산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성인 임(林)자와 같아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지.

임난수는 매일 전월산에 올라 맑은 우물을 떠 놓고 고려왕의 건강을 빌었는데 높은 바위에 올라 묵상하며 고려의 왕에게 절을 올린 곳을 부왕봉(俯王峰)이라 하고 바위에서 묵상한 곳을 상려암(想麗巖)이라 부르고 있지. 또 맑은 물을 떴던 우물을 용천(龍泉)이라 부르고 있어.

세종대왕은 비록 조선에 협력을 하지 않았지만 고려의 절개를 지킨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같이 임난수에게 상을 내렸으니, 그가 죽은 후 1419년 세종대왕은 사당에 선액(宣額)하고 사패급복(賜牌給復)을 내렸어. 즉, 선액이란 임난수 사당의 현판을 왕명으로 써서 내렸으며, 글씨를 신숙주 아버지인 신장으로 하여금 임씨가묘(林氏家廟)라 써서 내렸고, 제사를 불천지위(不遷之位-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도록)로 지내도록 명 하셨지.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했던 장기면 일대 수도 이전 계획도

사패급복은 땅을 하사하시었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 시켜 주었는데 당시 하사 받은 땅이 나성일구강산(羅城一區江山)으로 지금의 독락정이 있는 곳에서 보이는 만큼의 땅이니 연기군 남면 나성리, 송담리, 진의리, 양화리 일대 이므로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는 중심지역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

세종대왕께서 내려주신 사제문(司祭文)에는 “시기를 도울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 만한 공을 세웠다.” 라고 쓰여 있으며, 청양 현감 김미(金敉)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무릇 공(功)은 다른 시대에 있었으나 그 포상이 이와 같이 훌륭하였도다.” 하였지.

세종대왕은 임난수 장군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도 많은 특전을 주었어. 그 이유는 임난수의 아들들도 아버지와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절의를 지킬 때 조선의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주었는데 받지 않고 부모를 모시면서 초야에 묻혀 살았어. 임난수의 셋째 아들 임서(林叙)와 와 넷째 임흥(林興)이 그러하였지.

임서(林叙)는 고려 공민왕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고려 말에 충위교위좌군사직 을 지내다 조선이 개국되자 아버지와 함께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공주 삼기촌(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살았으며 조선의 조정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제수하여도 이에 응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종대왕은 장례를 왕명인 예장(禮葬)으로 치르도록 하여 그의 부인과 함께 예장으로 조성 되었지, 세종대왕의 명으로 치룬 예장은 묘의 봉분 하단의 돌을 다듬어 네모 형태로 만들었어.

임난수의 넷째 아들 임흥(林興)은 위의 금오위를 지냈으며 학행으로 산윈동정 금주지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연명 시키기도 하였으며 효(孝)를 다하였지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고려의 관직을 지냈었다.” 라며 나가지 않으니 세종대왕은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겼어. 어느 날 문득 세종이 임흥에게 관직을 내리며 그를 부르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으나 보낸 사람이 도착하던 날 임흥이 세상을 떴어.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임흥의 장례를 예장으로 치루 도록 명을 내렸고 임흥의 묘는 봉분이 네모 형태로 만들어 예장 (禮葬)으로 치러졌지.

그래서 세종시 내에는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예장으로 치러진 묘가 3기가 있으니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한 인연이 아니겠니.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