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만에 다시 만나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44년만에 다시 만나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23.04.03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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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정년 퇴직한 두 교수, 스승과 제자 인연 맺은 사연
이은봉시인 , 수학 전공 이길섭교수 3년 전 제자로 받아들여
대학시절 시를 좋아하는 선후배를 만났던 이은봉 시인(사진 오른쪽)과 이길섭 교수가 44년만에 만나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대학시절 시를 좋아하는 선후배를 만났던 이은봉 시인(사진 오른쪽)과 이길섭 교수가 44년만에 만나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인생 60 후반의 두 퇴직 교수가 새롭게 사제지간(師弟之間)을 맺었다.

서로 다른 길, 44년 시간을 뛰어넘고 동료가 아닌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만들었다. 무슨 별난 사연이 있을까.

세종에 사는 시인 이은봉(70)과 제자 이길섭 교수(67) 이야기다.

두 사람은 시를 좋아하고 한남대학교에서 동문수학했다. 각각 국문학, 수학을 전공하면서 이 시인은 졸업 후 멀리 광주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이 교수는 모교에서 수학과 교수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옛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가 고향인 이 시인은 전공을 살려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집 출판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은퇴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동인지 '세종시마루'를 펴내고 '삶의 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척박한 지역 문학계를 기름지도록 갈고 있었다.

이 시인은 대학시절 수학과 한 후배가 시에 관심이 많고 곧잘 서정적인 시를 짓곤 했다는 정도의 가벼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제자 이길섭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이길섭 교수는 대전고교 재학시절 문학소년이었다. 고향인 공주 사곡면 무성산 기슭의 잔잔한 풍경을 시어(詩語)로 표현, 주위로부터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전공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수학이라는 학문에 몰입하면서 대학시절 만났던 선배 이은봉 시인에 대한 기억과는 먼 생활을 해 왔다. 44년동안 시작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지난 2020년 11월 ‘시’(詩)를 매개로 다시 만났다.

이제는 문학계의 어른이 된 이은봉 시인을 찾아 이 교수가 제자로서 입적을 하게 된 것이다. 평소 제어하기 힘들었던 시심(詩心)을 맘대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자 바로 대학시절 선배 시인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4월 봄볕이 내리쬐는 날, 나란히 손잡고 ‘세종의소리’를 방문했다.

- 이길섭 교수를 제자로 받아들인 게 언제쯤인가요.

“(이은봉 시인) 한 3년쯤 된 것 같은 데 그렇죠.”

“(이길섭 교수) 2020년 11월 20일에 처음 만나뵀어요.”

- 두 분이 다시 만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은봉)떨어져서 생활했지만 한남대 사무처 직원이 서로 간 소식은 전해 주었어요. 대학시절 수학과 후배가 시를 쓴다고 해서 같이 한두 번 만났지요.”

이은봉 시인은 ‘4.19기념행사, 대전지역 진보성향의 문학단체, 1976년 발행한 '창과 벽' 동인지에다 무크지 ’삶과 문학‘ 등에 대해 한참 동안 얘기했다. 지역 문학 역사를 줄줄이 꽤고 있었다.

“(이길섭)저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선생님이 소통하시는 걸 이리저리 듣고 있었어요. 평소 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탓에 퇴직 후 이제 글을 좀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교직원에게 연락했더니 이은봉 선생님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래서 만나게 됐어요.”

- 시인으로서 가능성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은봉)전통적인 서정시를 잘 쓰더라고요. 고향이 공주 사곡 무성산 아래인데 자연적인 분위기를 살려 특유의 시어를 만들어냈어요. 한 일가를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는 마음이 순수한 게 중요하거든요.”

이은봉 시인은 “시인은 쉽게 감동해야 하고 감동하는 걸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말을 빌어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길섭) 저는 시를 막 쓰기 시작하면 굉장히 과격해지고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어질 수가 있어요. 그쪽으로 가지 않는 건 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해요. 서정적인 시가 그래서 좋아요.”

- ‘초로’(初老)라고 하면 실례가 될 수 있지만 두 분은 그런 나이가 아닌가요.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요.

“(이은봉)친구처럼 지내는 거죠,”

“(이길섭)선생님하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하고 제자 사이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은봉 시인이 주관해서 만든 세종시마루 동인지, 이길섭 교수를 2021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이은봉 시인이 주관해서 만든 세종시마루 동인지, 이길섭 교수를 2021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약 30여분간 진행된 인터뷰는 제자 이길섭의 첫 시집 출판으로 화제가 바뀌면서 마무리로 향했다. 빠르면 올해 말쯤 스승의 지도로 개인 시집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소재는 고향 무성산 기슭에 숨어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될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지난 2021년 '세종시마루'로 등단한 늦깎이 시인 이길섭의 어릴적 추억과 시심이 함께 그려질 예정이다.

이은봉 시인은 지난 2021년 신인상을 받은 이길섭 시인에게 “청년시절부터 시를 써 왔지만 수학자로 활동하는 동안은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다”며 “이제 다시 시로 돌아와 아름답고 섬세한 시정을 창출하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고 평가했다.

44년동안 떨어져 지냈던 두 퇴직 교수가 스승과 제자로 맺은 새로운 인연이 시로 승화하면서 훨훨 날아오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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