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이성산성, 백제가 쌓고 신라가 보수했다
전의 이성산성, 백제가 쌓고 신라가 보수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20.11.0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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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굴조사 현장 설명회... 삼국시대 국경에 위치, 치열한 공방 벌인 군사적 요충
산성 역사 백제까지 거슬려 올라가는 세종시 최초 조사, "문화재 가치 충분해"
전의 소재 이성산성 시굴조사 현장보고회가 6일 열려 이 성은 백제가 축조하고 신라도 한동안 사용한 흔적을 발견했다. 사진은 산성 전경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이성(李城)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조됐으며 백제와 신라의 국경에 위치, 치열한 공방을 벌인 현장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세종시 전의면 신방리와 전동면 송성리에 소재한 이성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축성한 흔적이 발견되면서 그동안 고려시대로 추정했던 산성 역사가 서기 550년 전후로 올라가게 됐다.

세종시는 발굴조사 전문기관인 한성문화재연구원과 공동으로 이성산성 시굴조사 보고대회를 6일 오전 10시 현장에서 갖고 이 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성 정상부 일대에서 6~7세기 백제와 신라의 유물들이 다양하게 출토돼, 이성이 위치한 세종시 일대를 두고 대치하던 백제-신라 양국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내용이 공개됐다.

이성산성이 백제시대 석축산성으로 밝혀지면서 세종시에서는 공식적으로 산성의 역사가 백제시대까지 올라가는 최초의 조사가 됐다.

이에 따라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悼)가 쌓았다는 전의면 일대의 구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게 됐다.

조선시대 초 1530년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도의 옛집이 가운데 있고 우물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문헌상 이도의 축성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성산성은 이성산을 모자의 테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길이 486m로 이른바 ‘퇴뫼식 산성’이다. 이번 조사로 ▲백제와 신라의 축성 ▲양국의 접전지역 ▲4단 형식의 내부 건물지 ▲2m높이의 저수시설 등이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확인됐다.

백제가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에 의해 점령됐고 성벽은 2차례 이상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가장 바깥쪽의 성벽은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와 관련된 성벽으로 추정됐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처음 축조한 이후 점차 바깥으로 성벽을 증축하면서 현재의 규모로 확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바깥쪽 성벽의 높이는 약 8m 정도로 높게 쌓았으며, 지형에 따라 사용된 성돌의 크기와 형태를 다르게 조성됐다.

백제가 쌓은 1차 축조 현장<사진 왼쪽>과 신라가 쌓은 2차 축성 현장

동벽 안쪽 다짐층에서는 백제토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볼 때 이성을 처음 축조한 국가는 백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4단을 쌓아 건물을 올린 내부 건물지는 좀처럼 보기드문 건축 양식으로 중요한 구조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돼, ‘위계’(位階)가 있는 산성 역할과 함께 문화재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성산성은 읍내리 토성과 운주산성, 증산성, 금이성, 작성 등 세종시 북쪽에 위치한 성곽들과 일직선으로 연결되면서 방어선을 구축, 한강을 점령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분석되고 있다.

이칠복 세종시 관광문화재과장은 “삼국시대 격전지에 위치한 성이라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가 충분하다”며 “연차별 발굴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을 추진하고 복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유지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5세기 중엽 옛 연기군에서 대전, 옥천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산성이 많이 분포돼 있어 정밀 조사가 요구된다.

세종시는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지표조사로 파악하기 어려운 축조세력과 시기, 방법, 성격 등을 규명하고 복원 정비를 통해 지역에 역사성을 더해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계획이다.

군사를 지휘했던 장대지 건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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