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은 설익은 날...현 세종시와 같아
설날은 설익은 날...현 세종시와 같아
  • 임영수
  • 승인 2013.02.08 09: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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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 관장이 들려주는 '설날', 이것만은 알고 지냅시다

   설날은 '설익은 날', 즉 시작하는 날에서 유래됐으며 '차례'라는 말은 조상에게 귀한 차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세종시가 출범하고 첫 번째 맞이하는 설날이다.
예로부터 설날이 돌아오면 아이들은 신이난다. 새 옷을 입고 반가운 친지들을 만나고 차례를 지낸 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더군다나 세배를 하면 용돈을 받을 수 있으니 일년중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으랴.
그런데 정작 설날을 맞이하여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내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그래서 세종시에서 일어나는 설날에 대하여 몇가지 이야기를 시작하려한다.

먼저 설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설날은 1년중 첫번째 날로 음력으로 1월 1일이다. 양력을 쓰기전 모두 음력으로 사용할 때는 설날이 1월 1일이라는 것은 당연하나 양력을 쓰고 있는 요즈음에는 음력 1월 1일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분명 1월 1일은 1년 365일중 첫번째 날이다.

앞으로 364일을 보내야 하니 아무것도 없는것과 같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없는 것을 덜 익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음식을 익히려면 불을 지펴서 익혀야 하는데 이제 시작하려하니 하나도 익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을 ‘설익다’라고 부르는데 설날은 설익은 날, 즉 익지 않아서 익히려고 시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종시가 맞이하는 설날은 세종시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설날은 현재의 세종시를 나타내는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왜 차례라고 할까요... 귀한 차 조공으로 부족현장 빚자 술로 지내도록 허용, 그래서 '곡차' 

설날에는 아침에 차례(茶禮)를 지낸다.
차례는 설날, 추석등 명절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칭한다. 그런데 왜 하필 차례(茶禮)라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옛날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茶)를 우려 지냈다. 즉 오늘날 녹차를 우려서 올리므로 조상들이 가장 좋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술을 따라 올리지만 적어도 조선중기까지는 차를 올려 차례를 지낸 것 같다.

그런데 녹차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비롯하여 남도쪽에서만 생산된다. 그러니 그 양이 많지 않아 옛날에는 사대부 집안에서만 우려 마셨던 귀한 음식이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나라는 조선을 도와주었으니 조공을 바치는데 맛있는 차를 바치라 하여 조선에서는 차를 구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원성이 높았다. 제사 지낼 때 필수품이었던 차(茶)를 구하지 못하여 제사를 못 지낼 지경에 이르자 임금님께 상소를 올렸다.

차(茶) 구하기가 어려우니 다른 것으로 제사를 지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임금님께서는 차를 구하기 어려워 제사를 지내기 어렵다니 곡물로 술을 빚어 차 대신 사용하라 하였다. 그래서 당시 곡물로 만든 술을 차 대용으로 사용한다하여 곡차라고 불렀다. 지금은 곡차하면 스님들께서 몰래 마시는 술을 곡차라 부르고 있지만 곡차라는 이름은 분명 조선중기때부터 나온 신조어였다.

그때부터 구하기 쉬운 술로서 차례를 지내오고 있으니 지금 지내는 제사는 차례가 아니라 술례가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에는 차로 차례를 지낼 때에는 조상들께서 후손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날 꿈에 나타나 내일 조심하라며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였는데 지금은 조상이 꿈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술을 올리니 어떤 집은 독한 양주를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어 술에 취하여 후손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세종시에서는 차(茶)로 차례(茶禮)를 지내는것도 좋을듯 싶다. 차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음식 앞에 조상을 모시고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한지에 조상의 직함을 써 놓는데 이를 지방이라 한다. 지방은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이렇게 8명의 위패를 모시는데 이를 4대봉사(四代奉祀)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제사를 지낼 때 4대봉사는 아무나 지낼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양반들만이 4대봉사로 모시었고, 평민과 노비는 4대봉사를 할수 없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남의 말을 잡아먹는 윷놀이 대신에 점잖은 체면을 유지할 수있는 '승경도 놀이'를 주로 했다.

이는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된 갑오경장 이후에 양반들이 지냈던 4대봉사를 일반 평민이나 노비들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양반을 흉내내어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제사를 지낼 때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아졌다. 법도에 맞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행위이지만 사실 제사에는 특별한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집안 형편에 맞추어 성의껏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남의 집 제사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차례가 끝나면 아이들은 자연속에서 뛰어노는것이 일이다. 설날에는 어떤 놀이가 있을까? 놀이는 방에서 노는 놀이와 방 밖에서 노는 놀이가 있다. 방 안에서 노는 놀이는 윷놀이가 대표적인 놀이이다. 그러나 윷놀이를 가만히 보면 옛날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놀았던 놀이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놀이를 할 때 소리가 나거나 말이 상대방을 잡아먹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윷놀이, 신분이 낮은 층의 문화...양반들은 잡아 먹는 윷 대신 승경도 놀이로 점잖은 체면 유지

양반의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면서 양반이 꼭 알아야 할 관직을 외울 수 있는 양반 윷놀이가 있다. 이를 승경도라고 불렀다. 종이판에 무관과 문관의 관직을 외직과 내직으로 구분하여 써 놓고 윤목을 굴려 나온 수만큼 움직여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까지 올라 퇴임이 되면 이기는 놀이이다.

밖에서 노는 놀이로는 장치기가 있었다.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긴 장대에 나무공을 가지고 편편한 공터에서 양쪽에 골문을 세우고 서로 긴 장대를 이용하여 나무공을 쳐서 골문에 넣으면 이기는 놀이로 오늘날 축구, 하키, 골프가 섞인 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놀이는 근대에까지 이어져 마을 청년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를 지고 모이는 장소가 장치기를 하는 『장판』이란곳이다. 장치기를 하여 해온 나무를 따먹기도 하고 마을의 명예를 걸고 놀았는데 지금은 이러한 놀이가 사라져 놀지 않는다. 다만 세종시의 옛 지명을 살펴보면 이 놀이를 하였던 『장판』『장고개』라는 지명만 전하여져 올 뿐이다.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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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실 2013-02-08 19:22:58
설날의 유래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