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 끼리 즐기는 설날, 과연 좋은 것일까
끼리 끼리 즐기는 설날, 과연 좋은 것일까
  • 조한수
  • 승인 2013.02.04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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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의 세상과 놀다]함께 나누는 새해...불우이웃은 어때요

설날 명절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명절 기간이 곧 다가온다.
그럼 이러한 새해 첫날을 명절로 삼는 전통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명절’이란 의미를 지닌 말로는 영어로 ‘홀리데이(holiday)'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거룩한 날‘을 의미하는 ’halidai'라는 중세 영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축제는 거의 종교성을 갖고 삶의 문화로 탄생하게 되었다.

많은 명절 중에서 새해 첫날은 ‘거룩한 날’의 축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날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날의 기원은 아직 세상에 달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아서 씨앗을 뿌리는 때부터 수확을 하는 시기까지를 ‘한 해 ’혹은 ‘ 한 주기’로 간주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달력으로 삼아 살던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역사적 기록상 최초의 신년 축제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바빌로니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에서 거행되었다. 이 축제는 봄이 시작하는 3월 하순의 춘분에 시작하여 11일 동안 계속되었다. 공휴일을 즐기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설날은 끼리끼리 즐기는 것보다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 축제를 집전하던 사제는 동트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 유프라테스 강의 물에 몸을 씻고 그 지역 농사의 신인 마르둑에게 풍년을 허락해 달라고 기원하며 노래를 올렸다. 이와 더불어 그는 ‘쿠푸루(kuppuru)' 라고 불렀던 의식을 거행했는데 머리를 자른 양(羊)의 엉덩이 살을 마르둑 신전 담벼락에다 발라서 신전건물과 또 내년의 농사에 닥칠지도 모르는 액운을 닦아내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사람들은 각종 음식과 포도주, 독주 등을 엄청나게들 소비했는데, 이는 먹고 즐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해의 풍년을 허락한 마르둑 신에 대한 감사의 행위로 그렇게 먹어댔던 것이다. 6일째 되는 날에는 풍요의 여신에 대한 찬양의 일환으로 가면무언극이 공연되었고 이어서 화려한 퍼레이드가 신전에서 출발하여 바빌론 교외에 지어놓은 새해의 집에 이르기까지 펼쳐졌다. 그러면 이렇게 씨를 뿌리는 날로서 새해 첫날을 지내던 것이 어떻게 해서 봄이 아닌 이 추운 겨울로 옮겨졌을까?

천문학적으로나 전문적인 농업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1월은 농작의 주기, 혹은 새해를 시작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1월에는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네 개의 시점인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때처럼 해가 하늘에서 어떤 기준점에 서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로마인들은 1월로 이 새해의 첫날을 옮겨버렸는데 여기엔 복잡한 비화가 숨어 있다.

고대력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봄이 시작하는 3월25일을 한 해의 첫날로 삼았다. 그러나 황제들과 고위관리들은 자신의 재임기간을 늘이기 위해서 달과 해의 길이를 마음대로 조작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기원전 153년에 이르러서는 달력의 날짜가 천문학적인 기준점과 너무도 맞지가 않았다.

마침내 로마 원로원에서는 많은 공식행사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1월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공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짜 조작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46년 줄리어스 시저는 달력을 다시 1월1일에 맞추기 위해 1년을 445일이나 지속하게 했다. 그 해는 ‘혼돈의 해’라는 역사적 명칭을 이후에 얻게 되었다. 이러한 시저의 새로운 달력은 이후 줄리어스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봄이 시작하는 3월 25일을 한 해 첫날로 삼아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신년축제를 열게 했다. 그러나 초창기 기독교회는 모든 이방 풍습을 철폐했고 이를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하여 교인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교회는 이방축제와 맞서기 위해 기독교 축제를 전략적으로 계획했다.

1월 1일의 신년축제에 맞서기 위해서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신 날을 명절로 설정한 것이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 등 일부 교회들은 이러한 명절을 지키고 있다. 중세시대에는 이교도식 축제를 교회가 강력하게 규제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도시에서 신년축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단지 지중해와 대서양을 가르는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서만 1월1일이 고수되었다. 1월1일이 세계적으로 통용된 것은 겨우 지난 4백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서방의 1월1일의 새해 명절과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근대국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날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다.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에 태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일본 명절인 천장절(天長節)·명치절(明治節) 등을 국경일로 정하여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다. 광복 후 우리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설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일반인들은 설날을 명절로 여겼다. 그래서 설날은 급기야 ‘민속의 날’이라는 지극히 어색하고 궁색한 이름이 붙여지고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와서야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었다.

이제 주말부터 우리나라에는 대대적인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이 될 것이다. 설 명절에는 그동안 보고 싶었던 가족들과 어른들을 뵙고 인사를 나누고 정겨운 덕담으로 한 해의 시작을 축복하고 격려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가족끼리만의 명절을 넘어서 소외된 이웃, 다문화 가족 등, 우리 문화에 익숙지 않은 이방인들까지 어우르는 사랑의 명절이 되면 좋겠다.

필자가 뉴질랜드에서 그들의 명절 때에 경험한 일이다. 보통 서양에서는 부활절기간이나 성탄절 기간을 가장 큰 명절로 생각하는데, 그들은 결코 자기들끼리만의 명절을 즐기지 아니한다. 그때가 되면 라디오나 신문 등지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명절을 지내자는 광고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살던 필자도 외롭지 않은 명절을 매해마다 지낼 수 있었던 좋은 기억을 가슴에 담고 있다. 우리 세종시민들도 이러한 명절문화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과연 명품시민이라고 세계민들이 박수치는 세계 속의 세종을 기대하며 따스한 명절을 생각해 본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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