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유의 풍물이 동네마다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요, 젊은이들이 많이 배웠으면 합니다.”
금남세종풍물단(구 금남덕진풍물단) 남덕희 고문(57)은 5일 대보름을 맞아 단원들과 함께 대평리전통시장 등을 돌며 신명나게 괭가리를 치면서 지신밟기에 나섰다.
금남면 용포리가 고향인 남 고문은 청년시절부터 동네에서 배웠던 풍물놀이를 명절 때나 동네잔치에서 선보였고 금남지역풍물패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97년 3월 25일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인 풍장을 바로 익혀 계승발전시킨다는 취지로 금남농악대(초대 회장 박정식)가 정식 발족됐다. 그동안 연습실이 없어 곤란을 겪다가 우시장이 폐쇄되면서 남은 건물에 연습실 겸 사무실을 얻고 임영수 향토사학자 등의 자문을 얻어 덕진(德進:금남의 옛 지명)이라는 명칭도 덧붙였다.
금남덕진풍물단의 창립멤버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은 남덕희씨는 2대 단장을 맡아 풍물단을 발전시켰다. 인근 유성의 안산산성 산성제에 98년부터 풍물을 선보여 2008년까지 계속 참가했다. 또한 연습실 구비를 계기로 풍물 선생님을 초빙해 실력향상을 꾀했다. 그 결과 99년 10월에 대전에서 한밭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제6회 전국풍물대회에서 ‘일반부 차하’의 성적을 올렸다. 이어 2003년 10월에는 백제문화제 행사시 열린 제2회 충청남도 풍물대회에서 영광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충남풍물대회 3, 4, 5, 7회 대회에서 장려상을 타는 등 실력 있는 풍물단으로 알려져 갑사장승제 등 여러 지역의 행사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유치원, 초등학생 등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성과를 올렸다. 그중에는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김미연양이 아버지 김현식씨(충북상회 대표)의 손에 끌려 풍물을 배웠다가 ,그게 연이 되어 올해 금호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인연도 있다. 김양은 요즘 대전의 국악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나면 풍물단 사무실에 와서 연습을 하기도 한다.잘 나가던 금남덕진풍물단도 한 때 단원 간에 갈등이 생겨 위기가 왔고, 이때 수습차원에서 남덕희씨가 5대 회장을 다시 맡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세종시가 탄생되면 외지에서 많은 분들이 이사올 때 회원 증가 기대"
남고문은 지신밟기 행사 등에서 마련된 기금으로 장학금과 불우이웃돕기에 쓰고 회원들의 친목부터 도모했다. 하지만 쇠퇴한 명성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현재 풍물단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남덕희씨는 “풍물을 배우고 같이 동참할 수 있는 인원 확보가 무엇보다 어렵다”며 “세종시가 탄생하고 외지에서 많은 분들이 이사 오면 풍물 회원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그래서 지난해 3월 창립기념일에 기존의 금남덕진풍물단에서 금남세종풍물단으로 개명했다. 세종시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남고문은 “교육장소도 있는 만큼 유능한 선생님을 모시고 아이들에게 풍물교육을 다시 시키고 싶다”며 목표를 위해 회원들과 동네 유지들의 협조를 당부했다.평상시 레미콘 운수사업을 하고 있는 남고문은 동절기엔 대전에서 이견주 선생을 초빙하여 회원들과 실력을 연마하고 있고, 연륜이 짧은 회원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남고문은 “풍물은 스트레스해소에 만점이고 정신적으로 좋고 육체적으로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며 “취미생활로 최고”라고 풍물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비굴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남덕희 고문은 세종인으로서 당당하게 고향 땅이 상전벽해가 되는 날을 대비해 열심히 풍악을 치며 즐겁게 봉사하고 있었다.
금남세종풍물단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