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집 아들이 돌아왔어요"
"서당집 아들이 돌아왔어요"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2.09.21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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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인]조각가 안의종 건양대 교수...눌왕리에서 왕성한 작품활동

   조각가 안의종은 연기면 눌왕리 고향으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면서 백제의 혼을 실어내는 조각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조각가 안의종(54).
그를 ‘연기’에서 만났다. ‘세종시’는 신작로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연기’라는 옛 지명은 정감이 훨씬 더했다. 그래서 '연기' 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그의 작가 노트에 ‘연기’는 깎을 수 없는 조각과 같았다. 세종시 연기면 눌왕리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도 태생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귀소(歸巢)본능 때문이었다.

눌왕산 앞자락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21일 오전 10시 30분에 마주 앉았다. 몇 번에 걸쳐 약속을 잡았으나 번번히 삐끄러진 탓에 이날 조우(遭遇)는 새삼스러웠다. 2층 높이의 농산물 창고마냥 생긴 작업실 앞마당에서 그는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간단한 수인사 후 “큰 작품인데 여기 놓아두었더니 누가 가지고 갔어요”라며 달포 전 잃어버린 작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짐작컨대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어서 고철로 팔아먹기 위해 훔쳐간 것으로 보였다. 그게 작가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앉을 자리라고는 조그마한 탁자뿐인 그곳에 안 작가와 마주했다.

“여기는 제 고향이에요. 바로 저 아래가 생가고요. 아버지가 서당을 하셨는데 서당집 자식이 다시 돌아와 작업장을 낸 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 해 5월, 부친이 물려준 500평짜리 땅에다 50평 남짓한 작업장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돌아온 서당집 아들을 내 자식인양 반겼다. 서당을 하면서 어머니가 동리 분들에게 술밥을 끊이지 않고 내 준 적덕(積德)이 아들 대에 와서 용천(龍泉)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의종 작가의 작품

“다 농사 일 품앗이를 하던 분들인데 갑자기 대학을 가고 교수가 되어 돌아오니 깜짝 놀라더군요. 제가 농사를 지으면서도 나중에 무엇을 되든 다시 돌아와서 농사를 하겠다고 말했거든요. 암튼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라워 했어요. 제가 돌아온 걸 보고...”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같은 안 작가는 활발한 작품활동과 함께 건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골에서 유명한 조각가에 대학교수까지 겸직(?)을 하는데다가 귀향까지 했으니 입을 벌릴만도 했다.

“사실 저희 동네가 빈촌이었어요. 그 때 초등 졸업생 240명 중 70명만 중학교에 가고 이중 또 반 정도 고교에 진학을 할 만큼 전체적으로 이 지역이 가난한 시골이었지요. 그래서 국군 대전통합병원이 바로 옆에 있어 거기에서 야학(夜學)을 개설, 머리 좋고 가난한 친구들은 야학에서 검정고시로 진학해 잘 된 녀석들도 많아요.”

어려운 시절, 모두 공감하는 얘기다. 보리고개니 검정고무신에다 보자기 책 가방, 불에 대면 거짓말처럼 없어지는 나이롱 양말 등등... 가난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단어들이다. 안 작가는 그 시대에 살았다. 중학교 졸업 후 한해 꼬박 농사를 지은 것도 2남 4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난 원죄였다. 형이 공부를 해야 하니 한꺼번에 둘은 버거운 가난이 농사꾼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태어난 재능은 숨길 수가 없었다.

“미술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연남초등 때도 곧잘 각종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곤 했어요. 소질이 있다고 선생님들이 말씀도 해주셨고요. 그림보다는 판화를 많이 했어요. 그게 재미도 있고 잘하는 분야니까 더 집중도 되고 그랬어요.”

코흘리개의 교사가 되는 꿈은 대학교수라는 개량형 꿈이 되어 활짝 피었다. 하지만 안 작가가 꿈을 이루는 과정은 지난하고도 험난했다. 지금은 없어진 성남중에서도 미술시간이 제일 재미있었으나 선생님이 자주 바뀌면서 그의 재능은 빛을 발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택한 길이 바로 ‘독학’이었다.

“미술 이론 책을 사서 봤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매 학년마다 바뀌니까 저를 알아줄 리가 없었죠. 선생님은 꼭 되어야 하겠고... 그래서 책을 읽고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허균 문화예술상 수상을 하고 있는 안의종 작가

안 작가의 숨어있었던 재능은 공주고를 진학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바로 미술부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하게 됐다. 강남 귤을 강북에다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던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귤은 탱자가 된다.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 자칫 탱자가 될 뻔한 그는 공주고에서 개화를 시작했다.

“공주의 모 버스회사에서 전적으로 미술부를 지원해주었어요. 말하자면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니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죠. 경희대, 홍익대, 조선대, 원광대에서 실시하는 실기대회를 휩쓸고 다녔죠.”

물 만난 고기였다. 게다가 홍익대 출신 유명 작가 임동식씨가 공주고 출신 3명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름방학 한 달을 그의 작업실에서 합숙훈련을 시켰다. 일취월장(日就月將), 그의 실력은 비온 뒤 대나무처럼 솟아올랐다. 재능은 그렇게 세상과 마주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역시 가난이 문제였다.

“하루 종일 소묘만 시켰는데 수준이 올라가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인생에 멘토를 잘 만났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죠.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집에서 놀다가 바로 군대에 갔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은 꿈도 못 꿨죠.”

군대 3년은 영사기를 돌리는 정훈병, 차트를 쓰는 차트병 등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했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면 예술 분야를 떠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틀어주면서 작품의 구도를 익혔고 연기에서 조각가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표정을 배웠다. 1983년 제대 후 농사를 또 2년간 재수했다. 손재주가 있으니 쟁기도 직접 만들었고 지게도 뚝딱하면 만들어졌다. 소를 잡아야 할 칼로 모기를 베는 셈이었다.

28세로 늦깍이 대학생이 된 안의종은 ‘만인의 형’이었다. 1985년 충남대 미술학과에 들어간 그는 1학년 때부터 충남 미술대전, 중앙일보 콩쿠르, 한국 현대미술 대상전까지 대상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석권(席卷)을 했다. 안 작가의 인생에는 필요할 때 멘토가 등장했다. 경익운수 신영철 이사, MBC 이은명 사장, 임치환 프로듀서, 신대현 전 건양대 총장 등...

“대학에서 조각을 본격적으로 조각을 전공했어요. 붓을 통하는 그림과는 달리 조각은 직접 손으로 만져서 하다 보니 감정이 직접적으로 작품에 나타나는 게 좋았습니다. 또 무거운 것을 들거나 옮길 때 동료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하는 예술과는 다르죠.”

쟁기를 만들고 뚝딱하면서 지게를 맞추던 그의 손은 이제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해내는 예술가의 손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절제된 표현’이 특색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오래도록 생각토록 하는 게 안 작가의 작품이었다. ‘심미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표현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뭉퉁하게 만들고 그 속에 숨은 메시지를 찾도록 유도하는 게 그의 작품 세계였다. 마치 신라시대 ‘토우’(土偶)같다고나 할까.

   불교 조각 공부를 위해 안의종 작가는 고교시절 2년간 절에서 생활했으며 대학 졸업 수 인도에 가서 구도자의 심정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배움은 한남대 박병희 교수를 만나 심미적인 표현에 깊이를 더했고 대전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작품에 유교적인 냄새를 덧칠했다. 고교 때 2년간 절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후천적인 DNA를 형성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그게 인도에 불교 조각상을 구도자의 심정으로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형태는 많이 변하기는 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는 게 저의 작품세계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의 힘’이 발동하게 되는 셈이지요. 제기(祭器)를 만들 때 사사로움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그는 눌왕리에 돌아온 것을 세종시 출범과 묶여서 설명했다.

“대평리는 산이 있고 고고한 반면 세종시는 들녘이 있고 풍요롭습니다. 여기에 걸 맞는 작품을 탐구하는 게 첫 번째 생각입니다. 또, 연기군은 백제 멸망 당시 예술인들이 숨어서 혼을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지요. 백제 미술의 혼을 이어받아 행정도시 세종시와 멋진 조화를 이뤄보고 싶습니다.”

공주 석장리 고분과 멀지 않는 첫마을은 지리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는 동네라는 말과 함께 “비굴하게 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서당 훈장인 부친의 뜻을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안 작가는 “건양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감동을 주는 작품 활동을 많이 하고 싶다”며 대담을 마쳤다. “이제 여기 들어왔으니 자주 만나고 싶다”는 기자의 말을 작별 인사로 대신했다.(연락처) 011-458-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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