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 눈이 문풍지 흔드는 밤, 선조만났다"
"싸락 눈이 문풍지 흔드는 밤, 선조만났다"
  • 임영호
  • 승인 2016.02.29 09: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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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칼럼]김훈의 '남한산성',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주무대인 남한산성은 역사의 질곡이 빼곡히 담겨있는 곳이다.
슬픔이 나를 옥죄는 역사 속에서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참 더디다. 김훈의 글은 더 시간이 걸린다.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 군더더기 없는 날카로운 표현을 되새김질해야 맛이 느껴진다. 역사소설인 김훈의 '남한산성'은 그래서 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산성과 관련된 전문용어와 궁중에서 쓰는 말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서 사전을 놓고 읽었다.

김훈은 기자출신이다. 소설이라고 해서 터무니없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거기에 당시 상황을 색칠하여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의 또 하나의 소설 '칼의 노래'를 읽을 때처럼 숨을 쉬었다 멈추었다 반복했다. ‘남한산성’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게 한 소설이다.

청은 만주벌판에서 살던 여진족이다. 우리가 국경선 밖 오랑캐로 한없이 무시한 족속들이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으로 칭하고 나라를 세웠다. 여진족으로는 대단한 역사다. 이에 비하여 당시 조선은 민심이나 민생, 군사력이 최악이었다.

전쟁으로 뼈만 남은 강토
1592년부터 8년간 왜란으로 산야가 짓밟히고 나라는 기력을 잃어 백성은 백성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헤어나지 못했다. 광해군이 1608년에 등극하여 전후 복구와 백성의 삶의 향상에 힘썼으나 서자에다가 차남으로 왕의 지위가 불안하자 집권세력인 대북파는 강경한 정국운영을 하여 정적을 양산했다. 그런데 외교는 줄타기를 하면서 잘했다.

지는 해인 명나라하고는 거리를 두고, 뜨는 해 청나라의 힘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탈이었다. 서인인 친명 사대주의자들의 불만을 샀다. 1623년에 그것도 하나의 명분으로 서인 주축의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 이듬해 1624년에는 혁명세력의 하나인 이괄 장군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왕이 공주까지 피난을 갔을 정도이다.

민생보다 허울 좋은 명분
조선은 30년 동안 전쟁으로 내란으로 총체적인 어려움에 빠졌다. 그즈음 국경너머 대륙의 후금은 중국대륙의 무서운 호랑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었고 명나라의 숨통을 쥐고 중원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있었다. 이때 집권한 인조와 서인의 노골적인 죽어가는 명나라 편들기로 배후의 불안을 느낀 청이 드디어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김훈은 칸의 독백형식으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답답하고 먹먹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텐데, 기를 쓰고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 압록강을 건너 송파 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P.281)

이 소설의 배경은 병자호란 중인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과 삼전도에서 항복한 날인 다음해 정축년 1637년 1월 30일 사이, 47일 간 피난처인 남한산성에서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일어났던 일을 소설화 시킨 것이다.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
김훈의 글 솜씨는 광고인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칭찬할 정도로 뛰어나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인다. 당시 사대부들이 말싸움만 하지 실천이 없는 공리공담에 대하여 그는 벼슬아치들을 뱀에 비유했다. "그들은 밖에서 싸우기보다는 안에서 싸우기를 더 잘하는 사대부들이다. 그는 문장으로 발신(發信)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혀들의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청 태종의 문서에 대한 답서를 쓰려고 신하 네 명을 선발하여 일을 시켰다. 후세 만대의 치욕이 될까봐 정육품 수찬은 답서 대신에 문장으로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똥오줌 싸고 정신이 혼미함을 늘어놓았고, 정오품 교리는 걱정만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논둑에서 죽었으며, 정오품 정랑은 엉뚱한 안시성 싸움을 끌어내어 문장의 대부분을 채워 간택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나라도 없고 품계가 없는 마구간 노복과 다름이 없었다. 오직 자기뿐인 사대부들이다.

만고의 역적 최명길
소설은 역시 등장인물이 결정적이다. 김훈은 당시의 사람을 등장시켜 상황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판단을 하게한다. 다름이 곧 틀림은 아니다. 지배층의 주류는 실리보다 명분을, 실천보다 말만 앞세우는 잘못을 깨닫게 한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가지고 싸운다. 이것만이 당면한 살 길이라 하면서 한 사람은 끝까지 항전하자는 척화파로, 한 사람은 일단 화의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화의파로 각기 주장한다. 왕은 대의명분보다는 현실과 실리를 내세운 화의파인 최명길의 손을 들어준다. 최명길은 이렇게 말한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다. 태평한 세월 때 하는 것이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모두 불타고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상헌은 수양산에 은거하다 굶어 죽어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이 된 백이(伯夷)처럼 되나 자기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한다." 그의 용기가 대단하다. 그는 민생이 이념보다 우선이라고 보았다.

대의명분은 좋은 것
김훈의 표현이 적확하다. 결국 척화라는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화의라는 역적이 문을 열어 준 꼴이다. 그 후 역사는 최명길의 말대로 주화파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오랑캐와 타협했다하여 역적의 무리로 몰아갔다. 상헌의 척화파들이 거듭 집권을 하면서 주화파는 후에 소수세력인 소론(少論)이 되고 정치적 압제를 피해 은둔하거나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고 조선후기에 청의 실질적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실학자로 태어났다.

이에 비하여 조선후기 세도가문인 안동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으로부터 시작된다. 세도정치의 시작인 순조시대 세도가 김조순은 김상헌의 손이다. 그들의 가문은 이후 수많은 영의정과 판서를 배출했다. 우리 정치가 실리는 나쁜 것이고 대의명분은 좋은 것이라는 프레임의 근원이 여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지도<출처:한국역사연구회>

현실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보수와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는 진보는 자유와 평등처럼 늘 경쟁한다. 그런 사회가 건강하다. 그러나 이긴 자는 의례 경쟁을 파괴하고 질서를 앞세운다. 왕이나 실권자는 한쪽이 몰락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조선이 망한 것은 보수가 진보와의 경쟁 대신에 질서를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인간, 그다음 국민
김상헌이 나루터에서 뱃사공을 죽였다. 그는 청병이 오면 얼음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보려고 하였다. 백성은 목구멍이 삶 자체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의 관심사이고 국가는 다음이다. 나라가 사느냐 망하느냐를 두고 전전긍긍할 때 영의정 김류의 길을 가로막고 올해 농사를 져도 되느냐를 묻던 노인들도 장삼이사(張三李四) 백성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빠졌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인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백성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다. 국가는 개인의 책임 있는 자세로 발전하지만 국가가 단지 지배계급의 옹호자고, 백성을 한 인간으로써 존중되지 않은 사회에서 백성들이 국가를 의식하는 공동체 정신을 갖는 것은 일반백성에게는 사치이다.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 있다.

애국심도 이기적
애국심도 조건이 맞아야 일어나는 심리다. 삶이 너무 잔인하면 자신을 귀하게 써주는 쪽이 조국이다. 청의 통역관 정명수가 그렇다. 그는 평안도 은산 관아의 세습노비였다. 아비와 어미 둘 다 노비였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도 비참하게 죽었다. 그에게 나라는 본래 없었고 태어난 자리와 고을을 버려야만 살 길이 열렸다. 정명수는 압록강을 건너 용골대의 최 말단 사수가 되었고 역관이 되여 청의 주구가 되었다. 실제 이조왕조실록에 그의 일화가 100회 이상 나온 것을 보면 그의 매국노적인 행태는 짐작이 간다. 결국 애국심이란 개인으로서 존엄이 유지되어야만 우러나는 값나가는 심리다. 애국심도 이기적이다.

각자의 책임 다하는 백성
이 소설에서 가장 바람직한 백성은 누구일까? 대장쟁이 서날쇠와 어수사 이시백이다.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맡고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번영된다. 서날쇠의 일터와 그의 일하는 방식에 김상헌은 감탄한다. 한마디로 '몰입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눈썰미가 매서운 대장장이였다. 쓰임새와 몸의 형태에 따라 농장기와 병장기를 만들고 목수들 연장까지 만들었다. 똥물을 익혀서 벌레도 잡고 땅 힘도 돋우고 화상도 치료한다.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있는 몸이다. 상헌의 심부름으로 지방관서에 격서를 전달하는 심부름도 한다. 말만 앞세운 조정대신들이 부끄러워할 일이다.

   남한산성 가운데 위치한 수어장대.
이시백은 실제 인물이다. 인조반정 공신인 이귀의 아들이나 특권 의식 없이 남한산성의 수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공신에 올랐으나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공직자로써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군병들의 동상 예방을 위해 공가마니를 찾아 보급하고 성 뿌리에 붙을 적을 막기 위해 돌멩이를 확보하고 물을 부어 얼음벽을 만들고 돼지기름을 이용하여 동상 환부치료를 하고 유격 군을 직접 지휘하여 출전도 한다. 최명길도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역사가 주는 감동
역사는 그저 추억이 아니다. 괴테는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은 바로 역사가 주는 감동이다. 역사에 관하여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자는 차라리 어둠 속에서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세상사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에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 끊임없이 대화를 만들어 남한산성 안에서의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치욕과 자존의 혼돈 가운데에 서있는 우리를 깨어있게 한다. 

바람에 실린 싸락눈이 문풍지를 흔드는 1월 어느 오후,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선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김훈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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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2016-03-04 09:38:04
세종의 소리에서 그나마 읽을만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