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아이들은 차분해진 낯빛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추억과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다. 그러나 아이들 대부분이 꽁꽁 닫힌 기억의 상자를 열어젖히려 끙끙댔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궁리하다가 끝내 추억의 실마리를 잡고는 한 자 한 자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도저히 끄집어 낼 추억이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결심한 듯 일주일 전 기억을 추억으로 채색하며 글을 써 나갔다. 나는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레 기억과 추억 사이의 거리를 더듬어 보았다.
갑자기 교실 한쪽이 웅성댔다. 한 아이가 글을 쓰다 눈물을 보인 것이다. 가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얘들아 사랑한다.”라고 말할라치면 선생님 오그라든다며 핏대를 세우던 아이들이 이때는 모두 걱정 어린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는 친구를 다독였다. 이윽고 몇몇 아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결코 잊어선 안 될 기억이 마침 떠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모호한 경계, 그 어디쯤을 채 깨닫기도 전에 넘어서 버렸다. 나는 어른이 된 것이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서러워졌지만 아이들을 통해 다시 기억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공감과 연민이 상실되어 가는 세상이다. 공감하는 능력이 마비된 것처럼 상대의 아픔에 위로는 커녕 잔인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고, 누군가를 조건 없이 믿는 일이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된다. 이 삭막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을 단비처럼 촉촉이 적셔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 보여준 눈물이다. 머리로 이해되기도 전에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진심을 담아 내미는 손이 지금 우리에게 아주 간절하다.
나도 어느새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달리 버릇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을 똑같이 읊어대는 어른이 되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내 속을 썩이고, 온갖 말썽에 머리가 지끈지끈하지만 나를 잃어갈 때 다시금 나를 일깨우는 것은 아이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 작은 몸짓, 맑은 눈빛들이다.
나는 국어교사다. 삶을 이야기하는 문학을 아이들과 나누는 일이 내 업이다. 삶의 소중한 진실과 가치들이 나를 거쳐 아이들에게 더 깊은 울림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내며 눈물짓던 아이와 전염된 듯 같이 눈시울을 붉힌 아이들, 이 아이들의 순수하고 예쁜 마음을 지켜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기를, 아직은 세상의 쓴맛을 덜 본 치기 어린 젊은 교사의 기도이다."얘들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