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과 해탈이 이 속에 있다고?
열반과 해탈이 이 속에 있다고?
  • 임영호
  • 승인 2014.03.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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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금강경은 고통의 치료학 불교 보여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대의(大義)는 아집과 법집(法執)을 파(破)하고 상(相)이 공(空)함을 나타냄이다. 대요(大要)는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로 체(體)를 삼고 묘행(妙行)으로 용(用)을 삼는다. (P18)

나는 한 선배님의 권유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대전 둔산 정토회관에서 열리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을 들었다. 게다가 그 선배님은 책표지가 빨간 색인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나에게 보시 하였다. 이《금강경》은 부처님이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로 열반하실 때까지 45년간의 긴 시간을 중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rtha)는 작은 왕국의 태자로 태어나 풍년을 기원하는 한 행사에서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어떤 이는 뜨거운 햇볕에서 고통스럽게 농사를 지으면서 못 먹고 헐벗어야 하고, 왜 어떤 이는 편안히 놀고먹을 수 있을까? 왜 세상은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다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 중생들은 참 불쌍 하구나 서로 서로가 잡아먹고 먹히니 말이다. 부처님은 올바른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예정된 부처의 조건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부처의 성품을 깨우쳐 부처가 되신 분이다. 또한 우리의 성품도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우쳐 주어 우리가 부처가 되도록 인도해 주신 분이다.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불성을 깨우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고통의 치료학 불교
불교는 고통의 치료학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상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길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삶의 아픔과 고통을 부처님께 호소했고 그러한 아픔과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고 그 내용은 모두 경전으로 전해 온다.

《금강경》이 그중 으뜸이다. 법륜스님은 《금강경》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의 모습은 변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혜능대사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삶의 방향이 달라졌듯이 말이다.

《금강경》의 본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다. 금강은 다이아몬드,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은 피안(彼岸)의 세계에 도달함을 가르친다. 《금강경》에 담긴 지혜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값지며 소중하며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물질을 다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처님과 수보리(須菩提 Subhuti)의 대화로 구성된《금강경》은 다른 경전과 달리 매우 특이한 논법을 구사한다. 긍정이 부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하는가 하면 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저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금강경은 말씀의 한 자락에 매달리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직접적인 언어로 표시하거나 표현하지 않으면서 수행자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일체중생이 평등함
부처님 사상의 한 모습이 《금강경》제1분에 나타난다. 부처님은 탁발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 제자 아난다와 마하가섭의 공양물이 대조적이었다. 아난다의 발우에는 기름진 쌀밥에 좋은 반찬이 담겨있는데, 마하가섭의 발우에는 먹다 버린 밥에 반찬이 형편이 없었다. 아난다는 부잣집을 찾아가 걸식을 했다. 가난한 집에 탁발을 가면 그 사람들도 먹기에 모자라는데 나누어 주기 어렵고, 그렇다고 시주를 안 하면 그 사람이 업을 짓게 될 것 같아 이왕이면 넉넉한 집에 걸식을 했다. 이에 반하여 마하가섭은 가난하다고 시주를 안 하면 다음 생에도 가난해지기 때문에, 가난해 시주하기 어렵지만 가난한 집에 가서 탁발을 함으로써 그들의 복전이 되고자 했다. 이 두 사람에 대하여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든 가난하든 가리지 말고 처음 탁발을 시작한 집에서 부터 차례로 일곱 번째 집까지만 밥을 비십시오. 모름지기 수행자는 분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집에 폐 끼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이나, 복을 짓도록 해주겠다고 하는 생각 모두 분별심이라 보는 것이다. 아무 구 별 없이 무심으로 차례로 일곱 집을 걸식하는 차제걸이(次第乞已)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부처님은 가난한 이에게 밥을 빌어 그들을 높였고, 왕과 귀족에게 굽히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낮추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보였다.

보리심(菩提心)
수보리의 첫 물음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과연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순간 바뀐다. 어리석음에 빠져 축생에 빠지기도 하고, 청정한 마음이면 수행자가 되기도 한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면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게 하고 어떻게 다스려할지가 숙제다.

육조(六祖) 혜능대사가 오조(五祖)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을 당시 그는 머리 기른 행자에 불과했다. 그런 혜능이 증표로 가사 한 벌과 발우(鉢盂) 한 개를 전했다. 홍인대사 제자중 하나인 혜명은 그 가사와 발우를 빼앗기만 하면 육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뒤쫒아 갔다. 거의 뒤쫒아가 이제 자기 차지가 되었구나 싶어 기뻐 날뛰었으나 발우와 가사는 바위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혜명은 ‛법이란 욕심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는 것을 깨닫고 혜능에게 법을 청했다. “나는 법을 위해 왔지 옷을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혜능대사가 혜명에게 물었다. “조금 전 마음은 무슨 마음이고 지금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육조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발우와 가사를 움켜 줬던 마음이 순식간에 법을 청한 마음으로 변한 이치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혜능대사의 간단한 질문 한마디에 혜명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보리심(菩提心) 즉 깨달아 널리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야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상(相), 괴로움의 근원
중생은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친구가 배신을 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괴로워한다. 이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히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인 신에게 매달려 제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빈다.

수보리가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있습니까” 물었다. 답답한 우리 삶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겠느냐 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중생을 내가 다 제도 하겠다”는 마음을 내라.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결국 부처님은 베푸는 마음을 내라 주는 마음을 내라 그러면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간에게 이 엄청난 일을 할 만한 힘이 있을 까? 법륜 스님은 자

 
신이 상담한 많은 경험담 중 한 가지를 든다. 결혼한 이래로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주정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 고생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매일 우리 남편 술을 끊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고 술만 보면 독약처럼 보인다고 말할 정도이다.

스님은 그런 부인에게 부처님께 108배를 하면서 ‘부처님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라고 기도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고 가정의 불화가 없어졌다고 한다. 나의 괴로움은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생각에 집착한 것에 비롯되었다.

‛술이 보약’ 이라는 말은 남편을 나한테 맞춰 바꾸려 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한 공덕은 내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미 다 받았다고 한다. 내가 남편을 구제했느니 아직 구제하지 못 했느니 하는 생각은 여전히 상대에게 내 삶을 얽매어 놓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복에 집착하면 놀부처럼 성한 다리를 부러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다.

상이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 등등 마음에서 일으켜 모양 지은 관념을 말합니다. (....) 상을 여읜다는 것은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나와 다른 의견과 주장, 나와 다른 종교와 신앙, 나와 다른 사랑의 방식도 모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상을 여읜 것입니다. (P63)

《금강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은 상(相)이다.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 등의 구별은 생각을 일으켜 모양 (相) 을 지은 것이다. 뱀을 보고 징그럽다,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
《금강경》에는 '상(相)을 여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전부터 도대체 이 '상(相)'이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모든 상(相)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상(相)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법륜 스님은 강조한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하는 구별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시시비비에 끌려 다니고 경계를 지어 자신을 묶어 놓는다고 한다. 부인에게 술이 보약이라고 생각을 바꾸라고 한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 고집을 버려야 상대를 볼 수 있다.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계시허망)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卽見如來(즉견여래)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98)

《금강경》제5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금 내 삶의 기준, 지금 내 눈에 그럴 듯 해 보이는 형상이 마치 최고의 가치인양 매달려 사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다. 이렇게 상(相)에 집착하면 괴로움의 씨앗이 되며 상(相)의 허망함을 깨치고 모든 형상의 집착을 뛰어 넘어야만 부처의 도리를 알고 자유와 행복의 참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가 약속을 수없이 어기면 짜증이 나고 싫어지는 것도 마음에 상(相)을 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안경을 벗어야만 본체를 알게 된다. 상(相)에 집착했을 때 ‘내가 상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상(相)이 상(相) 아닌 줄을 아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고 상(相)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면 그때 비로소 세계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뗏목에 비유한다. 나그네가 겨우 구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고 난후 고맙고 소중한 것이지만 이것 뗏목을 버려야 길을 갈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불가에서 스스로에 대한 최고의 경배는 목발이 되어 나를 걷게 해준 스승을 미련 없이 떠나는 데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일 뿐인 세상에 자기잣대를 들이대서 온갖 분별을 일으킨다. 상(相)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꽁꽁 묶어 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상(相)을 여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자유를 활짝 열어주는 불법의 길이다. 인연에 따라 상황에 맞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인연에 관계없이 하나로 고정되어 불변하는 상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불상도 법당에 모시면 부처지만 얼어 죽을 지경이 되면 땔감으로 삼을 수 있다.

여래와 물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名號, 이름과 호칭)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여래(如來)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가타 tathagata,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이 오직 법의 실상에 안주해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물처럼 스스로 어떤 모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없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뀐다. 세상이 성추행이다 뭐다하여 하루가 멀게 기사가 나온다. 책 속에는 법륜스님이 상담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성추행을 당했던 한 여성이 성추행으로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일어난 사건은, 내가 내 몸이 더럽혀졌다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더러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오랜 시간을 꿈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탁 깨달으면 이제까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P406) 법륜스님이 《금강경》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괴로움을 떠나보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성범죄자가 죄가 없다거나 그에게 죗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를 처벌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에 대한 처벌은 법대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우리가 사회구성원으로부터 무시를 당했을 때 울화와 무력감에 견디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채워 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한다. 금강경은 이 고통의 인간에게 고통의 사슬을 벗어나 마음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심경(心經)이다. 그동안 나는 ‘상을 여의다’ 라 는 말을 알지 못했다. 이한마디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절에 가서 어렵게 느껴졌던 《금강경》이 법륜스님을 통하여 가깝게 다가온 느낌이다. 내 마음에 낀 녹슨 갑옷을 벗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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