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으면 성공한다고?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고?
  • 조한수
  • 승인 2014.01.19 06: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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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의 세상과 놀다]행복이라는 주문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새로운 일 년이란 시간을 또 우리는 선물을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한다. 그리고 신년에 각자가 갖게 되는 마음의 소망을 우리는 덕담의 인사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하여서 나누게 된다. 특히 올 해는 갑오년 말띠 해이다. 필자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동물들의 띠에도 무슨 색깔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올해가 ‘청마’의 해라고 말한다.

누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색깔을 덧입혀서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 근거도, 역사적인 고증도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대중의 말에 쉽게 동류되어 살고 있다. 그렇게 동화되는 근본적인 심리에는 그러한 표현으로 대변되는 ‘행복’이라는 것에만 우리는 집중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간에 모든 인류가 가장 즐거이 사용하던 말이고 지금도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럼 ‘행복’이란 무엇일까? 철학적으로는 이를 ‘eudemonism'이라고 부른다. 결국 사람은 일생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의미로든지 자신의 생애가 마치는 최후에 가장 높은 행복의 경계에 도달하려고 하면서 자기 인생을 경영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행복주의에 젖어 살게 되면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이 되거나 또는 심리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기주의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행복주의는 고대 헬라적 철학에서 나온 생활의 방식인 ’헬레닉 센스 혹은 헬라적인 태도‘라는 것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 18,19세기에 이르러 ’공리주의‘라는 철학이론으로 발전되어 나왔다.

특히 경험론이 유행하던 영국의 철학계에서 이러한 이론이 활발히 나타나게 되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라는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 개혁가로부터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행복주의는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사실 공리주의 핵심은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이다. 도덕의 최고의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이다. 여기서 벤담이 말하고 있는 공리(功利)라는 것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와서 모든 고통을 막는 일체의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에 한결 매끄럽게 니스 칠을 한 노련한 칠쟁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벤담보다는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사람으로 벤담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원칙으로 공리주의를 다듬어 내었다. 우리는 그가 전한 말 중에’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행복을 줄 수 있는 방법, 즉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고르게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가장 좋은 선이다‘ 이란 말을 아주 좋아하며 기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사람들은 도덕적인 선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으로 선과 악을 구분했는가 하면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이것 하나로 판단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도한 행복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선이고 반대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어서 자꾸 타락하게 하면 그것이 악이다‘라고 언젠가부터 우리들은 선과 악을 이러한 식으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을 추구하더라도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사회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선은 개인의 행복이 보장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개인이 행복해야 결국 이 행복이 증진되어 사회의 행복도 증진된다는 이론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한 마디로 개인이 행복을 추구해서 얻으면 그만큼 사회도 비익(裨益)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행복론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경제 이론에서도 중요한 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서 소위 ’자유시장 경쟁‘이라는 말이나 ’자유무역‘이라는 경제사상이 태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능력껏 자유롭게 경쟁하여서 자기 행복을 추구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회에 유익이 된다는 생각을 경제학자들은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한 사고방식이 되어서 사회에 가난한 저소득층의 무리들이 생겨나면 사회는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고 반대로 사회에 부자가 많고 잘 사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사회도 그로인한 복리를 본다는 생각을 저마다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대기업을 밀어주게 되고 부자들을 위한 정책들을 마구 쏟아내는 실정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들이 요사이에는 종교계에도 그대로 스며 들어와서 특히 기독교 안에서의 교회도 저마다 행복을 부르짖고 ’현실적인 꿈‘ 부자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며 공리주의에 젖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들이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꿈의 교회, 행복한 교회, 드림 처취‘ 등등 행복에 호소하는 이름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자극한다.

이와 함께 전도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달리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성공한다‘는 식으로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해서 가르친다. 그런 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다 보니 기독교의 신을 생각할 때에도 결국 신은 이런 행복을 사람에게 주는 수호신 정도로 이해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행복을 약속한 신으로 이해하여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선행도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종교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봉사를 하면 하나님은 행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된 사상으로 생각을 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디에서도 바르게 살아야 하고,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죄에 대한 엄한 질책이 더 이상 교회 안에서는 들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주변에 교회는 홍수와 같이 많은데 정작 이 사회에서는 ’깨끗함이나 의(義)‘를 볼 수가 없는 어둠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는 그런 행복론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러한 공리적인 행복론을 말하지 않는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 사회의 어두움의 책임을 교회의 바르지 못함에 지적하고 싶다.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사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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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2014-01-21 08:25:19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대표적인 한가지로 요약할때 ( ? )의 추구로 보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