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안녕들 하시지요"
"다들 안녕들 하시지요"
  • 조한수
  • 승인 2013.12.22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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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의 세상과 놀다]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탄의 평화를...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 속에서 홍해 바다를 건너 하나님의 크신 구원함을 받아서 시내 산에까지 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나타나는 신정국가를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신정국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신정언약식을 체결하였다.

이때 체결된 법의 핵심이 우리가 다들 알고 있는 십계명이라는 열 가지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계명이다.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이 언약조항이 기준이 되어서 혹 여기에 못 미치거나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타락하였을 경우, 여지없이 그들은 언약적 저주를 받아서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받고 고통을 당하여야 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존재는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고, 이들을 언약의 법이라는 안경을 쓰고 당시 정치인들이나 전문 종교인들인 제사장들을 감시하는 소위 하나님의 검사들로 선지자라는 역할이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북조로 갈라진 솔로몬 이후 시대부터, 이런 선지자들의 외침은 날카로워졌고 더욱 고조되어서 이스라엘의 남북조가 둘 다 망할 때까지 이러한 선지자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그 시대가 암울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검사로서의 선지자들 중에는 썩은 왕권에 아부하여 거짓된 안녕을 꾸며대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왕조에 복을 주셔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와 같은 복 있는 민족이 없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안녕한 백성이다. 그런고로 모든 백성은 이 평화를 누리고 살라”는 식의 설교를 했다. 백성들의 마음과 위정자들의 정신을 모두 거짓된 평화에 젖어서 살도록 부추기므로 모든 나라는 이들의 아첨과 거짓에 바른 소리에 현혹이 되어서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두가 극도의 부패함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북조인 북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BC 721년에 앗시리아에 패망할 때까지 유래없는 경제적인 성장과 이로 인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남쪽 유다 왕국도 역시 BC 598년에 바벨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의 공격을 받아 모두 패망할 때까지 이들의 도덕적, 종교적 타락은 외적인 경제적 부흥과 맞물려서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안에서도 소수의 외침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결코 거짓된 평안의 소리에 속지 말라. 우리는 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 회복을 위해선 지금이라도 우리는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참된 선지자들의 소리였다. 이들이 외칠 때마다 이스라엘의 정치권과 종교권이 행한 것은 이들을 체포해서 이들의 입을 막아 더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족쇄로 손발을 묶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 같은 선지자는 톱으로 온 몸을 잘려 죽는 형을 당하고,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 경우에는 옥에 갇혀서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식의 처절한 핍박과 고통을 당하여야만 했었다. 이렇게 참된 선지자들의 입을 막고 손을 묶어서 참된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용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과 거짓된 평안에 기만당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린 이스라엘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 성경과 인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며칠 있으면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탄생하신 ‘성탄절’이다. 당시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정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특히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 로마의 어용 왕인 헤롯의 통치 속에서 살던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일반 백성들은 로마에게 인두세를 내야 했고 노동력을 바쳐야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그 때에도 사회의 공의와 안녕은 요원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위장된 평안을 깨고 참된 하늘의 영원한 안녕을 주시고자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남들이 주목하도록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셨고 저 로마의 귀족으로도 태어나지 않으셨다. 여기에 참된 평안의 역설이 담아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어느 대학생의 대자보의 신드롬으로 떠들썩하다. 평범한 이 물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뭉클거리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열풍을 차단하기 위해서 정치권과 기득권의 세력들은 동분서주하며 입을 막고자 야단들이다. 사실 나라의 가장 기본인 공의가 법이라는 우산 속에서 활발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가장 가난한 백성이라도 삶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받고 있다면, ‘안녕하시냐?’는 이 물음이 이토록 우리들의 마음을 찌르게 하고 아우성치게 하겠는가? 묻고 싶다.

나라의 공의를 묻고 있는 지금! 우리 각자는 공의를 사랑하고 있는가? 의를 지키고자 하였는가? 작은 법이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라도 지키고자 자신을 관리했는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웃들을 멸시하거나 손가락질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안녕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국민 각자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공의를 사랑하고 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 어느 못된 위정자라도 깨어있는 국민의 공의성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말게 될 것이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아모스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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