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민, 신도, 각급 기관장 등 약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기문화원 주관으로 개최된 이날 행사에는 ‘4.11 총선’ 직후여서 세종시 초대 선출직 당선자 이해찬 국회의원(민주통합당), 유한식 세종시장(자유선진당), 신정균 교육감이 동참, 유권자들에게 당선 인사를 했다.
백제대제를 알리는 범종 타종과 함께 시작될 예정이었던 행사에 앞 서 유한식, 이해찬, 신정균 당선자는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통해 “명품 세종시 건설과 세종시와의 운명적인 관계, 그리고 세종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등을 약속했다.
이어 다섯 번에 걸친 은은하면서도 소박한 범종 소리를 신호로 백제인들의 원통한 신원을 달래는 백제대제는 시작되었다. 한 해 한번만 공개하는 충남 유형문화재 182호 영산괘불탱화가 백제대제의 위엄을 더해주면서 대웅전을 향해 마련된 제단에는 과일과 만장 등으로 혼을 불러들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연기문화원 임영이 원장은 경과보고에서 “백제 역대 국왕과 충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673년에 전씨를 중심으로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어 이곳에서 매년 4월 15일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며 “1986년 연기에서는 온조왕 이래 역대왕, 충신에 대한 제를 올리기 때문에 ‘백제대제’를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역사학자 황수영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오늘 이 대제를 치르게 됐다”고 말했다.(경과 보고는 별도 기사로 작성, 맨 아래에 게재)이어 제례악을 배경으로 윤호익 연기군 부군수(군수대행)가 초헌, 이경대 군의회 의장이 아헌, 심은석 연기군 경찰서장이 종헌관으로 헌다(獻茶)의식을 행했다.
윤 부군수는 헌다의식을 마치고 곧 바로 추도사를 통해 “나라가 망하니 강산은 폐허가 되고 그 찬란하게 꽃 피웠던 문물은 희진하여 자취를 찾을 길 없으니 백성을 뿔뿔이 흩어지고 충신열사가 한번 죽고 나니 그 모습 다시 볼 수 없음은 어찌 후세들의 또 다른 슬픔이 아니겠느냐”라며 “백제인의 후예인 우리는 백제 중흥의 얼이 서린 연기 땅 운주산 천년사찰 비암사에 제단을 마련하여 매년 4월 15일 향을 사르오니 백제 왕이시여! 대신 충령들이시여!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어 왕생극락하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백제가 영원히 피워 올라 찬란한 문화를 부확시키고 성찰하시어 군민의 안녕을 살펴주시옵소서”라고 기원했다.제단에 향 타는 냄새가 비암사 경내를 휘몰아 가는 가운데 연기군 사암연합회 스님들이 반야심경을 낭독했다. 스님들의 반야심경 독경이 장내에 울려퍼지면서 백제 대왕과 충신, 법계중생들의 억울한 혼을 달래는 의식은 바라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광주 월곡사 주지 스님와 4명이 연출한 바라춤은 절제된 동작과 곡선미를 과시하면서 참석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면서 박수 갈채를 받았다.
헌화와 분향에서는 각급 기관장과 선출직 당선자, 그리고 연기군 의회 의원 등이 향을 사르면서 멸망국 백제의 대왕과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복신과 도침 장군들의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원한을 달랬다. 이날 최초 유민들의 뜻을 모아 석불비상을 조성하고 비암사 건립에 관여했던 전씨들의 분향이 행사의 역사성을 더해주면서 뜻 깊게 만들었다.
‘백제대제’는 연기소리 예술단의 가야금 병창과 연기불교합창단의 찬불가 ‘해탈의 기쁨’, ‘님이시여’ 합창을 끝으로 막이 내렸다. 백제의 슬픈 넋을 기리는 대제 참석자들은 비암사에서 준비한 점심공양으로 따스한 봄 햇쌀과 함께 열린 백제대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임영이 문화원장의 경과보고를 통해 본 백제대제의 유래
계유년 673년 4월 15일 백제유민들에 의하여 석불비상 8개를 조성하여 비암사를 짓고 시납하여 백제국왕대신 칠세부모를 위한 제를 올린데 기원하고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백제의 유민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본에 가있던 왕자 풍을 맞이하여 복신, 도침을 중심으로 연기군 일대 산성에서 피에 어린 구국 항전을 했지만 3년 만에 나당 연합군(신라 28만, 당나라 40만명)에 의하여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라는 빼앗겼지만 백제의 역대국왕과 충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673년 전씨를 중심으로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어 이곳에서 매년 4월 15일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과 1999년 9월 비암사에서 발견된 조선초기 제작된 기와에 ‘대백제국왕대신’이란 명문으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에는 제를 지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전의 고적 보존회가 향토개발사업으로 주류성과 비암사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온 결과 이를 재현하기 위하여 1983년 4월 15일 종파를 초월하여 전 군민의 이름으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을 ‘백제 충령제’라 이름지어 거행해오다 1989년 황수영 박사가 부여에서 지내는 ‘백제대왕제’는 성왕에서 의자왕까지 6대왕의 제를 올리지만 연기에서는 온조왕 이래 역대왕 및 충신에 대한 제를 올리기 때문에 ‘백제대제’를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발표에 의하여 ‘백제대제’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 부터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연기군 뿐만 아니라 백제권에서는 유일한 ‘백제대제’임을 알리는 행사 또한 병행해왔다. 2002년에는 4월 14일 ‘백제대제와 비암사’를 주제로한 학술세미나와 전야 행사 탑돌이를 하였으며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를 지냈고 모형석불비상을 제작하여 이를 시납하는 군사행렬을 웅장하게 재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