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잠재적인 반역자라고?"
"이순신, 잠재적인 반역자라고?"
  • 임영호
  • 승인 2013.09.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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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김훈의 '칼의 노래'...백의종군하는 대목에서 시작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장군의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 뿐 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책머리에, P7)

‘칼의 노래’ 소설의 줄거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전기와 크게 다른 게 없다. 이 책은 1인칭 소설이다. 이순신이 ‛나’로써 이야기한다. 한 나라의 생사를 걸머진 이순신, 그의 생각과 마음을 그 상황에서 말한다. 작가 김훈은 아주 극도로 절제된 10자 이내로 글을 이어간다. 문체가 칼의 삼엄함과 순결함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약 2년간의 이야기이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정유년 (1597) 4월에서 백의종군하는 대목에서 시작된다. 그때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후이다. 그리고 무술년(1598)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戰死)로 끝을 맺는다.

정치적 상징성과 자기의 군사를 바꿀 수없다.
이 작품은 죽을 곳을 찾아가는 한 영웅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의 고뇌는 무인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충군애국(忠君愛國)에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못하는데서 나온다.

당시 조정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서 부산으로 진공하게 되어 있는데, 함대를 이끌고 부산 해역으로 나아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해서 가토의 머리를 조정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맡겨달라고만 말하고 함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를 간절히 원했으나 그는 정치적 상징성과 자기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임금은 백성의 불신과 사직조차 보존하기 어려운 환란에서 충직한 부하조차 믿지 못하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지냈다. 이순신도 잠재적 반역자이다. 그러나 사직을 위협하는 또 다른 적이 이순신을 살린다. 왜군을 막기 위하여 이순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면사첩 (免死帖) 을 내린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면사첩을 받은 장군의 심리상태는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로 갈 것이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로 갈 것이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 바다는 아득히 넓고 나는 몸 둘 곳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밤새 혼자 있는 때가 많았다. 그는 무의미한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는 혼자 슬픔이 복받쳐서 울고 싶을 땐 강막지 라는 이름의 소금을 구워 바치던 종의 집에 가서 울었다.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를 잃고 도망치는 적들과의 마지막 전투에 앞둔 장군은 자기 소원을 말한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헛것을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를 만든다.
당쟁은 나라를 망쳤다. 이조중기 선조 조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은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인물로 하여 당쟁을 벌였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다. 정론(政論)도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사신이 조정에 보고한 것도 자기가 속한 붕당의 입장에서 각자 다르게 보고하였다.

이순신도 당쟁의 피해자이다. 이순신을 두고 한 인사의 파행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9년, 이순신은 정읍 현감 종 6품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에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 종 3품 자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사간원이 반대하였다. 너무 과격한 승진이라는 이유이다. 한 달 후에 만포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다시 부임하지 못했다. 사간원이 다시 반대하였다.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발령하였다. 사간원이 또 다시 반대하였다.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했다.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가리포 수군첨절제사로 변경 발령하였다. 사간원이 다시 반대하였다.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했다. 이해 2월13일 전라 좌수사 정3품에 임명되었다. 다섯 번 만에 겨우 자리를 얻었다. 이 혼란스런 인사파행은 조정 대신들 간에 권력투쟁과 당쟁의 여파였다. 왜란을 앞두고 이 꼴이라니... 한심하다.

“그들은 헛것을 쫒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 구조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김훈은 이전의 다른 소설가와 달랐다. ‛칼의 노래’는 동인문학상을 탔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은 젊은 소설이라 했다. 역사와 개인, 문체사이에 강렬한 대극(對極)이 있기 때문이다. 문체도 칼날처럼 건조하다. 저자의 말대로 이순신의 삶이 견딜 수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이 원고지에서 마주하여 부딪치고 있다. 시종일관 이순신이 싸워야 하는 존재는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승리해도 어떤 보답도 없기에 비극적이다.

이제 무거운 마음으로 끝낸다. 나는 책읽기전보다 더 많이 생각이 늘었다. 이순신의 검에 쓰여 진 글인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한수를 읽으면서 이순신을 한참이나 더 생각하고 싶었다.

閑山島 夜吟 (한산도 야음)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水國秋光慕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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