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충청 고속도로'였다
금강은 '충청 고속도로'였다
  • 송두범
  • 승인 2024.03.30 0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두범칼럼] 금강의 수운기능은 언제, 왜 쇠퇴했는가?
고마나루와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檀)<br>
고마나루와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檀)

공주는 금강과 계룡산을 품고 백제의 왕도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발달한 도시였다. 금강은 세곡이나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유통하고, 사람이 이동하는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18세기 유명한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금강의 상류를 적등강, 공주부근을 웅진강, 부여는 백마강, 강경부근은 강경강, 그리고 그 하류는 진강 등으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금강의 도시 중에서 특히 공주는 내륙수로와 육로의 대표적 교차점이다.

그만큼 통상의 기능이 중요하였고, 그것이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공주가 오랫동안 충청의 거점 도시로 살아남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개경 혹은 한성으로부터 호남으로 이어지던 육로거점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공주 금강은 많은 이들이 넘나들던 강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공주는 감영도시로서의 이점 이외에 금강 수계와 사통팔달의 도로망 덕분에 개항 이전부터 강경•논산•예산•둔포 등과 함께 독자적인 상품유통권을 가진 상업중심지였다.

공주의 젖줄인 금강은 주변 연안의 농업환경이 양호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인구 밀집도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수운로(水運路)로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말 일본인들이 수행한 조사 보고서를 보면, 금강 발원지에서 300리 떨어진 내륙수로 종점인 세종시 부강부터 군산까지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금강은 조류 영향이 부여까지 미치므로 이를 이용하면 선박 운항 시간이나 노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겨울에 금강이 어는 기간은 한강 수계보다는 짧아서 배가 오가는 기간도 조금 더 긴 편이었다.

당시 군산에서 강경까지는 만조에 벼 400~500석, 간조에는 300~400석 그리고 군산에서 공주나 부강까지는 벼 40~50석 정도를 실은 범선(平低船)이 금강 수계를 오르내릴 수 있었다. 1910년 당시 공주 백제대교 밑의 수심은 2.5m, 금강철교 쪽은 3.5m, 고마나루 건너편 쪽은 5m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인선교사가 촬영한 부강포구

당시 금강은 내륙수로로 여객과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선박이 왕래하였다. 금강을 항행하던 선박은 한선, 일본선, 중국선 등 매우 다양하였으며, 연간 15,000척 정도였다고 한다.

1900년 8월에는 인천을 오가는 일본 선박이 있었고, 군산과 강경 사이를 하루 한 번 왕복하는 여객선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강경~공주~부강 구간에는 정기 기선도 운항했다.

평지선인 범선은 군산에서 공주까지 이틀, 반대로 공주에서 군산까지는 하루 정도 걸렸으며, 기선은 군산에서 부강까지 8시간, 그 반대는 5시간 정도 걸렸다.

1910년 5월과 9월 공주와 군산 간에는 제일공주환(第一公州丸)과 제이공주환을 각각 개통했는데 당시 한 사람 운임은 1원 50전으로 쌀 1석이 25전 일 때였다.

이처럼 금강 수운이 비교적 활발해서인지 정산•부여•홍산•석성 등지의 물산은 육로가 아닌 금강을 통해 주로 움직였다.

경부선 부강역의 철도와 수운으로 육지와 바다 물품을 서로 교환하던 부강 지역 구들기나루(부강나루)는 장날만 되면 200여 척의 배가 정박했으며, 음식점만 해도 70여 개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10년대 초반 공산성 금강나루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해태로 불쏘시개를 하고, 명태로 부지갱이를 삼았다는 회고담은 당시 구들기나루가 얼마나 흥청대던 하안포구였는가를 말해준다.

이렇듯 명성을 떨치던 부강포구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물길과 철도 사이에 경쟁이 일어났고, 대전역이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부강은 내륙 포구로서의 기능이 약회되고부터이다.

역설적이게도 부강은 철도로 번성했고 철도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부강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오면 공주를 지나게 되는데 고마나루, 전막(신관동 금강철교 부근), 장깃대나루(옥룡동~신관공 공주대교 부근) 등은 드나드는 화물로 복잡했다고 한다.

공주지역 부자들은 위의 나루를 근거지로 삼아 소금과 어물을 통한 상업과 고리대업을 한 사람들이었다. 공주 인근에서 수집된 미곡 등 농산물은 대부분 공주에서 군산에 이르는 뱃길을 통해 일본이나 한양지역으로 이출되었다.

고마나루에는 금강을 지나는 배가 전복되거나 큰 일이 있을 경우 웅신단에 제를 지내 강신에게 바람이나 물결을 가라앉도록 기원한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檀)이 위치해 있다.

공주대교 아래 장깃대나루터 안내판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졌던 수운기능은 근대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철도교통과 개선된 육로교통이 대체했기 때문이다.

육로중심으로 교통체계가 바뀌자 강은 교통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교량이 공주 금강에 1933년 건설한 철교로, 백제시대 이후 ‘교류와 충돌의 무대’였던 금강의 수운 기능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금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부여 백마강에서는 수륙양용버스, 고란사선착장-구드래 선착장, 백마강일주 유람선을 운영하고 있다.

공주시도 금강 옛 뱃길을 복원해 공주보~세종보간 16km구간에 황포돛배 운영을 제안하는 등 완전하지는 않지만 금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관광활성화를 위한 제한적 수운기능의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