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 전 3월 22일, 인조는 공주로 오셨다
4백년 전 3월 22일, 인조는 공주로 오셨다
  • 송두범
  • 승인 2024.03.21 0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두범칼럼] 인조의 공주파천 5박 6일, 무엇을 남겼을까
인절미, 쌍수정 등 인조 흔적 곳곳에 남아 역사의 아픔전해
인조가 머물렀다는 쌍수정

1623년 능양군 종(綾陽君 倧)은 인조반정(反正)을 통해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모두 공주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광해군은 1593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약 80일 동안 임진왜란 중 공주에 주둔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의병활동을 독려하며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였다. 인조는 400년 전인 1624년 2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머무르다 한양으로 돌아갔다. 공주사람들은 30년 사이에 두 명의 국왕을 맞이했는데 한 쪽은 폐위된 왕, 한 쪽은 그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왕이라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고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 수십 명을 참형하였으며, 200여명은 귀양을 보냈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 2, 3등 으로 등급을 매겨 그에 해당하는 토지, 노비가 지급되고 자손들도 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이괄(李适, 1587~1624년)은 반정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 53명 중 1등 공신 10명에는 들지 못했으나 2등 공신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곧 이어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변방에서 고된 벼슬살이를 하게 되자 불만이 누적되었다.

1623년(인조 1년) 10월의 공신 책봉 후 4개월이 지난 1624년(인조 2년) 1월, 이괄의 외아들 이전(李栴)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가 들어왔고, 그를 한양에 불러들여 역모혐의로 조사하려 하자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은 평안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관군을 모두 격파하고 도성을 향해 빠르게 남하하여 영변에서 한양 근교까지 보름 만에 도착하였다.

1624년 2월 7일 인조는 자전(慈殿)·중전(中殿)을 먼저 강화(江華)로 보낸 다음, 어디로 파천할 것인가를 논의하였으나, 대사간 장유(張維)는 ‘공주산성은 앞에 큰 강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고 길도 멀지 않으니 급히 들어가 점거하고 있으면서 형세를 보아 진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공주로 파천할 것을 청하였다.

장유가 공주의 형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인조 즉위 직후에 호남의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고, 20세가 되기 전에 충청도 연산에서 사계 김장생 선생께 학문을 배웠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날, 공주산성으로 거동하기로 하고 한강에 이르렀으나, 강 건너편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새벽까지 강물 한가운데서 시간을 보내다 날이 밝자 겨우 강을 건넜다.

쌍수정 사적비

2월 9일 양재역에 이르렀고 과천을 지나 한밤중에 수원에 도착했다. 2월 11일 길원, 직산을 거쳐 저녁나절 천안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2일에 이괄의 군대가 서대문 밖에서 대패하고, 도망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계속해서 공주를 향했다.

인조가 공주에 ‘파천(播遷)’ 또는 ‘주필(駐蹕)’한 기간은 1624년 2월 13일(올해기준, 양력 3월 22일)부터 2월 18일(양력 3월 27일)까지 5박 6일로 일주일에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지만 공주는 국왕이 파천한 임시왕도였기에 공주에 큰 자취를 남겼고 오늘날까지 인조와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인조는 공주에 머물면서 이괄의 난 진압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의 공과 과에 대한 처분을 하였고, 이괄과 한명현의 수급이 공주에 도착하자 반란군의 우두머리의 수급을 왕에게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시행하였으며, 문사와 무사를 시험하는 과거를 시행하여 다섯 사람을 선발 하였으나, 여섯 번째 성적을 받은 공주사람 강윤형(姜允亨)에게도 특별히 급제를 내렸다.

또한 공주사람들은 대동미 두 말, 지나온 지역의 고을은 한 말을 감면하되 3년간만 적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충청감사 이명준, 병사 이완, 공주목사 송흥주 등에게는 직급을 올려주는 포상을 하였으며, 김장생과 박지계도 인조에게 세금감면과 무사 강습에 대해 아뢴 다음 인조는 2월 18일 한양으로 떠났다.

1700년대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인조가 갑자년 이괄의 난을 피해 여기에 거동하였다. 산 위에 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임금은 매양 이 나무에 기대어 북쪽으로 궁원들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말을 탄 사람이 나는 듯이 달려옴으로 물어보니, 싸움에 이겼다는 보고였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두 그루에 통정(通政)이란 칭호를 내렸다. 그 후 관에서 산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나무는 말라죽고 정자만 남아있다. 성안에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강화 광주와 함께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현재 쌍수정 아래 남아있는 쌍수정 사적비는 인조의 공주파천으로부터 80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년)에 관찰사 이선부가 세운 것이다. 비문은 신흠의 글이고,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썼다. 또 송시열이 지은 ‘쌍수정비음기(雙樹亭碑陰記)’와 남구만이 지은 ‘쌍수산성기사비추기(雙樹山城記事碑追記)’도 새겨져 있다.

인조가 공주에 머물렀던 6일, 인조의 공주파천 400년에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공산성 쌍수정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전설은 인절미와 도루메기의 유래담을 비롯하여 인조 아들 승선군이 한양으로 환도하던 길에 만난 한 여인과의 사랑이야기, 군량미 300석을 상납하여 우성면 동곡리가 조왕동(助王洞)으로 불리게 된 이야기, 인조가 피난 올 때 거쳐간 정안면 석송리(石松里), 금강을 덮은 얼음을 깨 배를 띄웠던 공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계룡 양화리 순천박씨 박정제, 공주에서 인조를 보필한 여흥 민씨 민여심과 화순 최씨 최기수도 그 공으로 공신이 되어 주요 문중으로 공주에 세거하는 등 인조의 공주파천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공주의 역사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공주한옥마을에 건립된 인조임금 공주파천 기념비

2011년 2월 13일 공주시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인조임금 공주파천기념비를 공주 한옥마을내에 건립하여 인조임금의 공주파천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 인조의 공주파천일에 맞추어 2024년 사백년 인절미축제가 산성시장 상인들의 주도로 3월 23일(금)~24일(토) 이틀간 공주산성시장문화공원 일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인절미떡메치기, 인절미시식회, 인절미토크콘서트, 인절미축하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다. 작년에는 인절미가 조기에 동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하니 조금 일찍 참여하면 공주특산 인절미를 맛보거나 구매할 수 있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