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중동성당, 그래서 더 유명해졌다
공주 중동성당, 그래서 더 유명해졌다
  • 송두범
  • 승인 2024.03.04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두범칼럼] 공주 최고의 천주교 성전 '중동성당'… 순교, 역사성, 건축양식
공주시 중동성당.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비극의 역사가 숨어 있는 곳이다. 

서울에 명동성당이 있다면, 공주에는 중동성당이 있다. 공주 원도심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높은 동산에 아름다운 천주교 중동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공주중동성당’은 서양 중세기 고딕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공주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이기도 하다. 

1898년 프랑스 기냥(Guinand, 陳普安) 진베드로 신부가 처음으로 강경골(현재의 중동)의 11칸짜리 기와집과 대지를 매입하였다. 이어 바로 옆의 9칸짜리 기와집과 대지를 매입하고 얼마 후에는 ‘관아 정문 오른편에 있는 21칸짜리 큰 기와집’과 ‘뒷편 언덕의 꼭대기’를 매입하였는데, ‘뒷편 언덕’이 바로 지금 중동성당의 부지일 것이다.

기와로 지은 공주 교회의 첫 성당 건축은 우여곡절 끝에 1989년 4월, 12칸 규모의 본당과 사제관을 완성하였다. 그 후 최종철(崔宗哲) 마르코 신부가 1936년 서울의 약현성당 건물을 모델로 한 새 성당 건립계획을 계획하여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직접 벽돌을 구워 1년여 만인 1937년 5월 12일에 현재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성당으로는 비교적 양식에 충실한 이 건물은 전통적 목조건물에서 근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성당은 최 신부가 직접 설계했는데, 정면 중앙에 종탑을 갖춘 벽돌조의 고딕 건물로 외관상의 형태는 라틴 십자형이다.

내부공간은 삼랑식(三廊式)으로 7개의 회중석과 제대 좌우에 제의실이 있고 출입구는 정면 이외에 중앙의 좌우에 각각 작은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한 것은 성당의 외형을 ‘노아의 방주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원래 이름은 공주성당이었으나, 1982년에 교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1936년 캐나다 출신 배(J.Bellerose) 신부에 의해 설계·건립된 사제관은 성당으로 오르는 진입로 끝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향은 동쪽이 정면으로 마당을 향하고 있다. 지상 2층 벽돌조 건물로 좌우 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벽곡을 통해 조적조 건물이 지니는 조형성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와 최종수 요한의 순교비<br>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와 최종수 요한의 순교비

지붕은 우진각의 형태이며 동판을 깔았다. 외벽은 벽돌조적에 의한 기둥과 인방의 선이 그대로 노출되어 나타난다. 전면 중앙에는 1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위치하고 있으며 좌우를 대칭 양분하고 있다. 전면 상부에는 조그마한 지붕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후좌우 외벽에는 창문이 배치되어 있고 창문의 상부는 아치구조를 하고 있다.

후면에는 좌우 대칭으로 굴뚝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각층에 마루널을 깔았으며, 내벽은 회반죽을 마감하였다. 1997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성당과 함께 대수리를 실시하였다.

한국전쟁은 공주 천주교회와 성당 건물에도 커다란 위기였다. 1950년 7월 공주에 진주한 인민군은 성당 안에 인민재판소를 두고 사제관을 정치보위부 건물로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성당이 미군 공습을 피하는데 아주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본당 신자들은 훗날 이렇게 증언하였다.

인민군에 의해 성당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성당에 들어 닥친 인민군들은 성당의 성모상을 비롯하여 감실과 제대에 총질을 하였고, 제의는 갈기갈기 찢어 버렸으며 성작은 밟고 찌그러뜨렸다. 성당 안에 군마를 매어 놓는 등 성당을 마치 쓰레기장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성당 안에서 인민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기도 했다.

성당 옆에 살던 최종철 신부의 형인 최종수 요한 형제께서 ‘누가 성당에 들어와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항의하자 인민군이 총으로 쏴 순교하였다. 그 후 성당사제관을 민청 사무실로 사용하다 정치보위부가 들어섰고 성당은 인민재판소가 되었다.

전쟁 초기 성당은 큰 수난을 당했고, 인민군이 철수하자 본당 신자들은 미군 군종신부였던 채를린 신부가 본당에 와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다시 성당을 축성해 주었다.

공주중동성당 사제관(후면, 측면)<br>
공주중동성당 사제관(후면, 측면)

중동성당의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본당 입구의 종탑과 함께 언덕 위에 세워진 지형적 특징으로 실제보다 웅장하고 근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성당 옆 성모상 옆에는 최종철 신부의 묘와 최종수 요한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1997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중동성당은 충청남도역사박물관과 국고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어 한때 성당과 박물관을 고가다리로 연결하는 계획을 수립한 바도 있다. 이 두 공간은 공주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중의 하나로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방문해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인근에 있는 3.1중앙공원, 영명학교 정문인 독립기념관을 함께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