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가 마주한 한 권의 책, 이상적인 세계 탐구위해 열망하는 순간됐다
튀르키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장편 로드 소설(road novel) 『새로운 인생』은 “어느 날 한 권의 책(‘그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책 한 권을 읽고 인생이 바뀌다니.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에 ‘그 책’을 만난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느끼는 꿈을 꾼 후에, 일이 풀리지 않거나 위안을 얻고 싶을 때에, 삶을 뒤흔드는 마법 같은 자극과 영감, 그리고 명쾌한 답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기대는 으레 무너지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 책’의 세계는 발을 들인 이상 멀어질 수 없고, 우주보다 넓고 거대하다고. ‘그 책’은 각자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지만, 각자의 존재를 견디게끔 해주며 적어도 덜 외롭게 만들고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그 책’을 만지작거리며, 책의 말과 책의 눈을 따라 새로운 여행을 떠나보자.
『새로운 인생』은 이렇게 읽혀진다. 오스만이라는 한 젊은 공학도는 ‘그 책’을 본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책에서 알게 된 이상적인 세계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여인 자난이 그 책을 읽고 있는 걸 알았고, 그녀를 만난 순간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집을 떠나 버스로 몇 개월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자난은 오스만을 그녀의 연인인 메흐메트와 만나게 한다. 메흐메트 역시 ‘그 책’을 읽었고 그것에 의해 변화되었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이미 ‘그 책’의 세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오스만에게 그것을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는 또한 오스만에게 ‘그 책’을 읽는 모두가 위험할 거라고 경고한다. 그 후 오스만은 메흐메트가 저격당하는 것을 멀리서 목격한다. 그가 그 장소에 달려갔을 때, 메흐메트는 이미 자난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오르한 파묵의 상상 속 이야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 책‘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새로운 인생‘을 실현할 어떤 실마리를 찾기 위한 몇 년 동안의 노력이 끝나 갈 즈음.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며 쓸쓸한 자각을 갖게 된다. ‘새로운 인생이란 비유할 데 없는 순간에 맛볼 수 있는 행복’이라고. 그리고 절규한다. 죽고 싶지 않다고.
물론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도정은 결코 쉽지 않다. 죽음까지 동반할 수 있는 온갖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그리로 향한 의지와 욕망이 그 어려움을 견디게 한다. 새로운 인생의 결과보다는 그것을 향한 과정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 상상력이 집중된다. “새로운 욕망으로 흔들릴 때, 어느 때보다 많이 내가 존재 한다”거나 “아무리 잘 읽은 저 포도라도 결연한 의지와 단호함이 없으면 그 맛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누구의 것에 대한 모방도 아닌 진짜 인생의 본질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의식과 욕망”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나의 욕망만 두드러진다면 세상은 “거대음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터이므로, 남을 위한 사랑의 덕목도 배려한다. “먼 곳의 세계를 이 세계로 가져오는 유일한 길은 사랑”이라며, 그것을 위해서 바라보는 시선(視線)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내게 웃어 줘. 그래서 내가 그 세계의 빛을 한 번이라도 네 얼굴을 볼 수 있게끔.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손에 책가방을 들고 과자를 사기 위해 들어갔던 빵집의 따뜻함을 기억하게 해 줘.”
그렇다면 주인공 오스만의 ‘새로운 인생’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염병처럼 퍼지는 책의 위력이 새로운 인생이라는 거창한 주제와 함께 계속 꼬리를 물며 읽는 이의 마음을 빨아들인다. 책이 이어준 한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을 찾아 버스 여행을 떠난다. 버스 여행은 사고와 사건의 연속이고 심지어 죽음을 목격해야만 하는 여행이 된다.
그 여행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방황하고 떠돌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순간들의 점철이다. 결국 새로운 인생이란 도달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서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이다. 책을 만나고 자난을 사랑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게 된 그것 자체가 주인공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주인공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게 한 ‘그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인생이 한 권의 책으로 바뀔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책’ 한 권 때문에 생각의 바늘이 엄청나게 다른 방향으로 이미 전환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서 결국엔 사고를 바꾸고 신념을 바꾸고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책’ 한 권이 커다란 인생을 바꾸는 힘으로 어마어마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책은 적어도 우리를 꿈꾸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갈망하게 된다. 결국,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갈지도 모를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또 남은 생이 점점 줄어들수록 안정적이고 안전한 삶에 안주할 줄로만 알았는데, 자꾸 모험적인 삶에 자석처럼 끌리는 것은 우리가 이제껏 읽고 있는 ‘그 책’들 덕분 아닐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린 평범한 물건, 한 권의 ‘그 책’은 내 세계를 휘젓고, 내 계절을 다른 색으로 채색해 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나의 영혼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몸이 녹아 없어지고,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모든 것이 책이 뿜어내는 빛과 함께 없어지는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책이 던진 화두를 풀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인생은 전범도 없고 결과도 예측하기 어렵다. 영혼이 타오르는 대로 나아가서 깨닫고 또 나아갈 따름이다. ‘책 읽기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던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 생각난다.
책을 읽는 행위란 사람의 뜻이나 마음, 상황을 알아차리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화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곧 다른 사람으로 거듭 다시 태어나는 타자가 되어버리는 경험이다.
새해다. 새로운 인생을 위한 새로운 항해를 떠날 때다. 기대와 흥분 속에서 새롭게 출발하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과 불안감과 동반하기 마련이다. 새해 목표를 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 하지만 늘 그렇다.
‘그 책’을 읽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와 게을러지고 안일해지는 전형적인 인간 군상이었는지 모를 오스만은 ‘새로운 타자’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은 타고난 수수께끼 해결사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희망처럼 새 출발을 하면 어떨까.
새해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려 노력하며 삶의 다양한 방향과 질을 바꿔줄 소원을 빌어본다. 아울러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 책’이 혹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기를 바라면서.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