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기, 누구냐,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대로 있어”
“ 거기, 누구냐,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대로 있어”
  • 김충일
  • 승인 2023.12.0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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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 셰익스피어 '햄릿', 420년 전 영국, "너는 누구냐" 정체성 시작
"해석의 다양성과 애매모호함으로 어렵고 답답하지만 도전적이고 매력적"

“ 거기, 누구냐,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대로 있어.”(“Who’s there?, To be, or Not to be, Let be.”)

겨울, 이파리를 다 떨군 나무들을 보고 있을라치면 자연스럽게 저물어가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면서 우리는 요즘을 잘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지 등 자연스럽게 존재론적 사색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정보기기의 보편화와 넘쳐나는 콘텐츠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야기된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선택지인 ‘생각의 미디어’를 찾게 된다.

나다운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하기엔 삶이 너무나 각박하고 하루하루가 바쁘지 않느냐는 옹졸한 핑계를 만드는 우리지만. 여기 420여 년 전 이국 땅 영국에서 ‘네가 누구냐?(Who are you?)’라는 정체성의 물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삶의 실천적 의지로 끝을 맺은 읽을거리가 있다.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작품을 읽어보았느냐 물으면 ‘그런 걸 왜 물어?’라며 난처한 표정으로 답하기에 머뭇거리는 작품 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만지작거릴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Hamlet)』이다. 누구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알고 있는 이 작품은 알 듯 말 듯 숨겨진 코드와 답을 찾도록 끊임없이 요구되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해석의 다양성과 애매모호함 때문에 ‘햄릿은 어렵고 답답하지만 충분히 도전적이고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햄릿‘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복수극이며, 비극은 언제나 그렇듯 존재(정체성)와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만든다.

<햄릿>이 등장한 17세기는 한 세기에 걸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충돌 끝에 “의혹과 불안”이라는 시대의 절망이 번져가고 있었다. 서양사회는 중세 천 년 동안 기독교의 품에서 하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신이 하나면 모든 것이 하나여야 한다는 중세적 사고는 치명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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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신을 믿는 다른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그 때 까지 돌처럼 단단했던 자명성의 세계는 흔들리고 모든 것은 회의의 대상이 된다.

내가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회의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 사실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란 누구인가?’란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근대적 주체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햄릿>이다.

우선 읽어보지 않았어도 알고 있을 것 같은 『햄릿』의 줄거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햄릿의 아버지인 덴마크 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왕의 남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이 되고 햄릿의 어머니는 클로디어스와 재혼을 한다. 선왕의 유령이 햄릿에게 나타나 클로디어스가 자신을 독살했으니 복수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햄릿은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한 ‘극중극’을 통해 유령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복수를 결심한다. 그 후 복수를 위한 ‘회의와 지연’ 속에서 심복 폴로니어스와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의 딸 오필리어, 아들 레이티즈도 검 끝에 바른 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왕비는 왕이 햄릿이 마시도록 독을 섞어놓은 포도주를 마시다 죽는다. 햄릿은 독이 묻은 레이터즈의 칼에 찔려 죽게 된다.

햄릿은 죽기 전에 왕에게 독약이 든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해서 왕을 죽인다. 복수를 위한 죽음의 페레이드다.

《햄릿》의 줄거리를 접해 가면서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의 다양한 문제를 포착할 수 있다.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라든가, 르네상스 시대상, 여자에 대한 성적 억압과 잠재적 차별, 삶과 죽음의 의미 등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결코 햄릿 개인의 존재 의미와 삶에 대한 고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가장 널리 퍼져있는 접근 방법으로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두드러진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그는 고뇌한다. 바로 그런 선택지가 곧 햄릿이 내면을 가진 존재라는 걸 입증한다. 내면이란 미지수이자 수수께끼다. 이런 내면과 함께 햄릿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부왕의 유령이 나타나 복수를 명령함에도 그가 주저하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존재여서다. 그는 한갓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존재다, “너는 누구냐?( Who’s there?): 〔Hamlet, Act: 1.1〕라는...

‘자기를 찾아가는 길’위에서 <햄릿>은 복수의 결행을 지연시키고 주저하면서도 신중하게 , 매사 계산된 행동을 하는 복수자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때 셰익스피어는 ‘또는(or)’이란 접속사를 선택 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 〔Hamlet, Act: 3.1〕)라는 고전(古典) 속의 문학적 수사는 일상이란 무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선택하다’란 현재진행형 동작동사로 다가온다.

전혀 상관없는 두 문장을 결합시켜, 충돌을 일으키고, 주인공 햄릿을 혼란에 빠뜨린다.

‘복수의 실행과 지연’이란 주체적 행동은 짝을 이루는 순간 상황은 불분명해지고 모호해지고, 고뇌는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해서 “To be, or Not to be?”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열린 상황으로 생성된다. 이와 같이 닫힌 사고의 틀에 길들여진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햄릿이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에 직면한다. 순간의 선택은 더 나아가 삶의 살아냄이라는 큰 문제로 연결된다.

가련한 왕자 햄릿에게는 그 것조차 ‘코끼리 발바닥’이었다. 답을 지연시키는 질문의 연속, 접속사 ‘or’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의 비극, 이것이 햄릿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력적인 서사의 힘’을 발휘하여 불확실한 저 비극의 현장으로 부터 ‘자연을 비추는 거울’(the mirror up to nature; 〔Hamlet, Act: 3.2〕) 앞에 서게 한다.

마지막 5막이다. 햄릿은 오필리아의 장례를 치르는 묘지에서, 왕의 어릿광대였던 요릭(Yorick)의 해골을 보게 된다.

그는 어렸을 때 햄릿을 수천 번 업어주고,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든 익살꾼이었음을 추억한다. 잘난 법률가, 두꺼운 화장을 한 귀부인, 그리고 알렉산더대왕, 시저 황제까지 결국은 죽어서 모든 것을 흙으로 돌려놓는다는 사실을 햄릿이 뼈저리게 깨닫기 때문이다.

햄릿은 인간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memento mori)도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헛된 일이라 여긴다. 모두 같은 해골 모습이 되고 흙이 된다며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

메시지의 변화는 “Who’s there?”라는 자기 성찰적 물음을 거쳐, “To be”와 “Not to be”사이에서 우유부단했던 햄릿이 “일찍 떠난들 무슨 상관이겠나? 섭리대로 그대로 두게”(what is't to leave betimes? Let be.”: 〔Hamet: Act 5.2〕“를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Let be”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수의 ‘지속적 주저’에서 벗어나 자기와 세상을 수용하는 ‘변신’의 수사이다. 햄릿이 무덤지기 광대 요릭의 해골을 본 후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그것인데, ‘let be’, 즉 ‘순리를 따라야지’이다.

그것은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데도 다 하늘의 섭리가 있다’(there's a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Hamlet, Act: 5. 2〕)로 압축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제 ‘자기(Self)’는 행위(복수)의 주체가 아니라 에이전트(수행자)가 된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는 변신에 따라, 햄릿이 가진 고민은 깨달음으로 바뀐다.

햄릿은 풀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 좌충우돌하면서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그는 드디어 복수의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다. 햄릿이 자신의 과업(복수)을 달성했다 해서, 그리고 삶에 대한 혜안를 얻었다고 해서, 삶의 굴레 속에 자리한 패러독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온갖 문제들이 조금 다른 빛깔로 바뀔 수는 있어도 그게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유동적이기에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없는 법. 우리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고뇌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하여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The readiness is all. 〔Hamlet, Act: 5.2〕)라는 셰익스피어 빛의 언어에 감탄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고귀한 본질의 깊이로 잦아든다.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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