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 대전이전, "큰 것 내주고 작은 것 겨우 챙겼다"
충남도청 대전이전, "큰 것 내주고 작은 것 겨우 챙겼다"
  • 송두범
  • 승인 2023.11.15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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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충남도청 대전 이전, 득실은 무엇이었을까
집값폭락,위상 상실 대신 금강철교, 공주농업학교 개교
공주는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는 댓가로 금강가교를, 그것도 어렵게 얻었다.

1896년 13道제의 채택으로 충청도는 남북도로 분리되고 공주는 충청남도의 수부도시로 충남도청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1910년을 전후하여 호남선 부설논의가 전개되면서 공주에 위치한 충남도청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충남도청 유치를 희망하는 지역은 대전, 조치원, 온양, 천안 등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치원, 온양, 천안이 도청유치에 실패한 것은 대전의 일본거류민과 같이 조직적이지 못했고, 김갑순과 같이 도청부지를 희사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당시 대전의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하였으나, 대전은 공주보다 인구나 도시기반 시설 측면에서 열악했다. 1923년 기준 대전지역 인구는 공주지역 인구보다 적었지만, 일본인들은 공주보다 3배나 많이 거주하였다.

대전의 일본거류민단은 충남도청 유치를 위해 비자금을 만들어 야마나시 총독에게 10만 원을 전달했고, 공주갑부 김갑순과 대전방직 가네후찌 사장은 도청이 공주 산속에 있어 불편하다고 하면서 대전 이전을 요청했으며, 김갑순은 대전의 도청부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전의 일본거류민단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비리혐의로 파면됨에 따라 대전의 일본거류민들은 체념하여 도청 이전을 물건너간 일로 생각했고, 공주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았다.

후임 사이토 총독은 1930년 1월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겠다는 기습 발표를 하였다. 사이토 총독의 발표로 대전은 환호성, 공주는 분노로 들끓었다. 공주 주민들의 도청이전 반대투쟁으로 충남지사 유진순의 출근길에 흙을 뿌리고, 김갑순 소유 극장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대전은 축제 분위기였으며, 부동산가격이 100% 이상 급등함에 따라 김갑순은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31년 7월 충남지역에 폭우로 370명이 목숨을 잃고, 4,211가구가 파손되었으며, 농경지 유실도 막대함에 따라 도청이전비로 책정한 예산을 수해복구비로 전용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있었고 일본제국회의도 충남도청 이전안을 부결시켰다.

공주시민들은 환호했고, 도청 이전문제는 거론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대전 거주 일본귀족인 시라이시 데스지로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의원의 결의를 귀족원으로 하여금 뒤집고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을 승인하였다.

1931년 새로 취임한 오카사끼 데스로 충남지사는 총독부에 건의하여 도청 이전의 댓가로 금강에 철교건설, 교육기관 설립, 제민천 제방축조비 20만원을 확보하였다.

1931년 9월부터 충남도청 이전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공주시민들은 길목 도로를 파헤치거나 돌무덤을 쌓아 놓아 이사짐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는 저항을 하였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932년 10월 1일 도청 이전식을 거행하여 충남도청 대전 시대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이날 이전식에는 우가끼 조선총독이 축사를 했고, 오카사끼 충남지사, 김갑순 참의 등이 테이프 컷팅을 했다.

조선총독부가 1년 이상 공주지역에 도청 이전에 따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자 공주지역 유지들은 총독부와 접촉을 통해 충남도와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요구 13가지와 일본정부 국비로 처리해야 할 요구 7가지를 제시하였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공주 공립농업학교 역시 도청 이전에 대한 보상이었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의에서는 중선철도(영월~조치원~공주~장항)의 건설, 관립사범학교 설치, 궁민구제 자금융통 등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 요구 3가지를 결의하고 폐회하였다.

충남 도청의 대전 이전으로 공주지역은 충남도 도청소재지로서 위상을 상실했다. 집값과 땅값이 폭락하고 당장 공주를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공주사람들의 응어리진 감정은 심지어 대전 사람들은 공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1933년 금강철교 가설과 공주공립농업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개교하였고, 이후에 도청 관련 행정기관의 대전 이전을 상당한 기간 동안 보류하였다. 그 후 도시기반 시설의 확충과 아울러 각종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성장하였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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