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매순간 초월을 꿈꾸고...알깨고 나온 새에게 경계는 없다
사람은 매순간 초월을 꿈꾸고...알깨고 나온 새에게 경계는 없다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7.1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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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일상 한계넘어 신의 세계로 가는 삶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은 깨뜨려야 할 것, 그런 다음 신의 곁으로 가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본문 중에서>

우리는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한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울까?”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단 한 사람일 뿐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목할 만한 존재 그 자체임은 분명하다. 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추구하는 좁은 길 찾기란 고단한 작업이며 그 어떤 삶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모호하게, 어떤 이는 좀 더 투명하게, 어떤 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누구든지 그 나름대로 애쓴다.

여기, 별을 바라보거나 책을 들춰 보며 찾지 않고, 단지 내 몸 안의 피가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즐겁거나,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은 무의미함과 혼란, 광기 그리고 꿈의 맛이 나는 삶의 알껍데기를 벗겨낸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청년 운동의 성경’이라 불려진다. 의도적인 낯설음과 익숙함을 거절하는 아픔을 겪어낸 ‘영원한 청춘’을 살게 해준다. ‘에밀 싱클레어’의 자전적 성장소설 『데미안 어느 청춘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초월을 꿈꾼다. 현실은 항상 미완이고 결핍이기 때문이기에. 일생동안 늘 현재적 ‘나’를 넘어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이를 완성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자, 초월의 과정에 의지에 관계없이 참여한다. 참된 자아와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탈각을 시도하면서 우리는 모든 초월의 방법을 꿈꾸며 몸부림친다.

주목하는 ‘데미안’에서 새의 비상을 통해 상향적 초월의 출구를 찾아 분투하는 ‘우리의 분신’이자 ‘나의 대행자’인 ‘알 속의 새 싱클레어’를 만나 보자.

그는 왜 그다지도 기존의 세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했을까? 우선 의식의 내피 속엔 광기에 가까운 내적열정, 자신의 길을 따르기를 바랐던 아버지(목회자)의 억압, 개성을 말살하는 신학교의 폐쇄성에 저항하는 방황이 짙게 붙어있다. 그런 과정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 헤세는 1차 세계대전에 이어 나치에 반대하면서 결국 스스로 관습의 옷을 벗어던지고 망명의 길에 오르는 국외자의 삶을 살게 된다. 분열된 자아, 제도권 교육제도, 독일 민족주의 등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깨뜨려야 할 외피였다.

“나는 고독 속에 빠져 갈피를 못 잡고 있었어요. 나는 그때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지구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새의 그림입니다. 몸의 절반가량이 지구에 파묻혀 있는 그 새의 그림을 친구한데 부쳐 줬는데, 그 일을 거의 잊어 갈 무렵에 한 장의 종이쪽지가 날아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계다. 알에서 빠져 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삶의 마당에서 살아나갈 때, 이런 저런 일과 생각에 상처를 입거나 위로를 받기도 하고 도전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알 속 세계’는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하고 익숙한 곳이기에 두려움은 전혀 없다. 생각을 펼치기엔 공간이 너무 좁기에 답답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 밖 세계’는 위험하다. 생명을 위협받기도하고 비바람이 안락한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선 새롭게 개척할 공간이 펼쳐져 있다. 생각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곳, 위험하지만 기회가 있는 곳이 바로 알 밖 세계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반복되는 답답하고 지루한 내 삶을 상징하는 알을 깨려고. 엄혹한 사회적 자아의 싸움터에 생긴 파편에 맞서 싸우려고. 그렇게 많은 실패와 상처의 아픔을 겪어가면서. 알을 뚫고 나와 창공을 비상하는 새의 삶으로 살아가려고. 때론 싱클레어는 “그 선을 넘으면 안 돼, 내가 해 봤어! 아무 소용없어 그 만큼 피곤하기만 해!”라고 행동의 실천을 가로막는 마음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가능성의 세계인 알. 그 알을 깨고 나온 새에게 경계란 없다. 새에게 날아다니는 하늘과 정주(定住)하는 땅은 별개의 공간이 아니다. 새는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이성과 감성,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노래하는 시인이다. 때론 하늘과 땅은 천국과 지옥이 대립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 비가 강과 바다를 이루어 땅의 생명을 자라게 한다. 생명은 호흡이기에 비는 숨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하여 새는 비, 강, 바다, 생명, 호흡이 된다. 새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품어 안고 있음을 비상을 통해 증언한다.

이 새가 향하는 곳은 신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다. 아브락삭스는 빛(善)의 세계와 어둠(惡)의 세계를 함께 소유하고 지배하는 신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반쪽만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다른 반쪽에 대한 동경과 함께 죄의식에 시달려야 하는 편협한 세계를 깨고, 빛과 어둠, 이성과 감성이 함께 공존하는 충만한 세계로 나아갈 것을 충고한 것이다. 알의 세계에 경계란 없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곧,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밑바탕을 둔 부성(父性)적 세계(복종, 절제, 성실)에서는 ‘…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 한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 안은 모성(母城)적 세계(자위, 자존심, 자유)에서는 ‘… 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 한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이 두 양심은 마치 ‘낮과 밤이 신의 동일한 뜻을 이루는데 함께 일하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지만 엄격하고, 자유롭지만 책임을 질 줄 알며, 복종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성실하지만 노예가 아닌 성숙한 인간의 세계로 안내한다.

왜 알을 깨고 나와 새가 되어 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울까? 삶은 녹록지가 않다.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 그건 새가 알에서 나오려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나 자기가 자기가 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다. 인간은 자기가 될 수 없어 불쌍한 건 아닐까.

그럼 어떻게 자기가 될 수 있을까? 싱클레어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시를 쓰기 위해 혹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각자를 위한 천직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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