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부강은 조선왕실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세종시 부강은 조선왕실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7.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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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유태희 세종시장 문화특보, '김재식 가옥에 얽힌 역사'

유태희 세종시장 문화특보가 부강면 김재식 가옥에 얽힌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했다. 여기에 의친왕이 머물렀던 새로운 사실을 구술을 통해 확인했고 문화재적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1편 '왕실 독립운동의 시작', 2편 '부강의 김재식 가옥에 의친왕이 머물렀다'는 순서로 글을 게재한다./편집자씀

유태희 문화분야 특보<br>
유태희 문화분야 특보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정의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인류는 유사 이래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해왔다. 따라서 권력층이나 왕조의 흥망성쇠는 병가지상사라고 할 만큼 흔하고 잦은 일이기도 하다.

강력한 왕조라 할지라도 500년을 이어온 왕조는 가장 강력한 왕조라 했던 중국이나 로마 등 세계역사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고 들은 바 있다. 그렇지만 500년을 넘긴 왕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은 518년을 이어온 한반도 작은 나라지만 영욕의 세월을 모두 헤쳐 나오며 518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사극만 78편이 공중파를 탔다.

그만큼 조선의 역사는 그 자체로 완벽한 드라마다. 이 모든 건 조선 왕조의 거의 모든 것을 기록한 실록이 있었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읽은 독자는 많지 않다.

고종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친왕이다. 의친왕은 고종의 5남 차남이자,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 중 유일한 독립운동가이다.

고종황제는 조졸한 자녀까지 합쳐서 5남으로 표현되나 최근에는 성인까지 생존한 분들 기준으로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3남 1녀로 표현하고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혹은 ‘차남’으로 표기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와 전주이씨종친회에서도 둘째 황자로 표현하고 있다. 의친왕은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 직후 의병 운동을 독려, 지원했으며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시도도 직접 했단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려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던 동생 영친왕과 장남 이건과는 달리, 실제 도림운동을 기획한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독립유공자로 공식 선정되지 못했다. 이것은 선정과정에서 이승만이 왕실을 제외하여 권력의 분산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물론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고 막강한 군을 보유한 일본의 야욕에 결국 무릎을 꿇고 국권을 상실했지만 이어온 세월이 500년이 넘는 나라가 무너졌다. 그러나 이 나라에 살던 사람들마저 정복하지는 못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시 자주독립국으로 우뚝 섰다. 비록 이념 차이로 반으로 나뉘었지만, 세계 10대 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시 일어섰다. 그리하여 왕실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세종시 부강에 있었다는 사실이 행정수도발전에 매우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하다.

당시 황족은 전원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오로지 의친왕만이 완강히 버텨서 한국에 남아 있었고, 의친왕의 자녀들, 운현궁의 이준용, 영친왕, 덕혜옹주까지 모두 4살~10살의 어린 나이로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일제의 손 아래 양육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일본에 의해 꼭두각시가 된 안타까운 역사도 있다.

한편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손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의친왕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여기서 의친왕이 상하이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상황은 『대동단실기』(신복룡 저)에 자세히 실려 있어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독립운동에 관한 부분이어서 내용을 간추려 이 책에 싣기도 했다.

 106년 전에 지어진 김재식 고가는 의친왕이 머물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br>
 106년 전에 지어진 김재식 고가는 의친왕이 머물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의친왕이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분을 숨기는 공작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요, 탈출을 도와줄 동지가 필요했다. 이처럼 자금 면에서나 탈출의 방법에서 자신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김춘기와 그의 동료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 차장인 강태동의 루트를 통하여 상하이에 있는 김가진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김춘기는 의친왕이 상하이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20만 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만원이 불가능하다면 우선 10만 원만 있어도 출국이 가능하다고 의친왕에게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종욱으로서는 그만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막중하고도 엄청난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대동단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일제가 을사늑약 이후 대한황실을 이왕가, 고종황제를 이태왕, 순종황제를 이왕, 영친왕을 이왕세자, 의친왕을 이강 공 으로 호칭을 격하해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당시 한국 언론들이나 문서에는 ‘이강 공’으로 표현이 되고 있으나, 이제부터라도 일제에 의해 격하된 호칭을 쓰지 않고 ‘이왕가’ 혹은 ‘이왕직’은 ‘대한황실’로, 이강 공은 의친왕, 혹은 의친왕 이강으로 부름으로써 대중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단원들은 정운복을 이끌고 이강 공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정운복은 이강 공을 향하여 "전하! 결심하소서"라고만 말할 뿐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강 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협의 무리도 두려웠고 경찰이 자기를 미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중략) 전협은 '우리 독립 정부에서 전하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오늘 그 시기가 도래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전하가 결심하시는 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라고 설득했다.

(중략)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이 진정된 이강 공은 전협을 향하여 강태동이란 인물을 잘 아느냐고 물었다. 전협은 자신과 김가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강태동은 김가진이 보낸 밀사로서 이미 자기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제야 이강 공은 상하이로 망명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거사가 진행된 첫날 이강 공이 자취를 감추자 서울부터 안동으로 가는 열차는 물론 전국의 경무국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안동역에서 요네야마 경부는 종로경찰서 근무 시절 창덕궁을 드나든 적이 있어 이강 공의 얼굴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강 공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경찰을 불러 이강 공을 둘러싸 체포했다고 ‘대동단실기’를 인용해 이 책에 옮겼다.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쓴 저자 이해경은 고종 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다섯째 딸로 태어나 근현대사의 풍파를 겪으며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구한말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암약했던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이자 목격자로서 평범하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열다섯 살에도 전담 유모를 두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목욕 시중을 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보살핌을 받았지만, 세계대전과 민족상잔의 육이오전쟁을 겪으며 남들이 공감하기 힘든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특별한 가정환경이었기에 시련의 아픔은 더욱 컸다.

이 집에는 의친왕이 내려준 편액이 있었다. 부강 황우제에 있었던 어머니를 그리는 '원모정'에 걸려있었던 현판이다. 내용은 효를 다하는 아들을 칭송하는 글이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한 후 음악 교사로 일한 바 있으며, 자유를 찾아 195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과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2022년 10월 14일부터 올해 초 1월 20일까지 강남 개포동 경운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와 연계하여 ‘의친왕의 기록과 기억’이라는 심포지엄에서 많은 시민이 참석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생애를 돌아보며 황실 독립운동을 재조명하여야 한다는 관심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고종황제의 구국 조서(詔書)와 순종황제의 순행(巡幸)에서 의친왕의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활약은 마음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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