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왜 자신의 주인공을 벌레로 만들었을까
카프카, 왜 자신의 주인공을 벌레로 만들었을까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6.1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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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칼럼] 『변신』은 ‘껍질 깨기 위한 삶의 도구, 자유의 방편 탐문’하는 또 다른 방식
카프카의 소설 '변신' 초판본 표지

“나는 오로지 콱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하러 우리가 책을 읽겠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Franz Kafka의 Aphorism)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도입부에 들어서자 마자 나 스스로가 ‘벌레’가 된 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낯선 질문에 혼란스럽다. 왜 카프카는 내 껍질을 깨기 위한 장치로 ‘벌레’를 불러낸 걸까. 나답게 나로 산다는 것은 결국 세상과 접속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다른 모습으로 ‘변신(變身)해 보는 일.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로부터 떠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를 들고 ‘변신의 마당’으로 들어가 보자.

『변신』은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한 가정의 가장노릇을 하던 그레고르라는 청년이 어느 날 아침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후 그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훌륭한 아들, 오빠에서 한 순간에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그레고르는 이제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니다. 하루 종일 자신의 삼면이 벽이고 하나밖에 없는 창으로 둘러싸인 방안에 갇혀 밖을 내다보며 자신과 자신의 삶을 곱씹어가다가 결국 주위 사람에게서 그것(it)으로 취급당하게 된다. 아버지가 던진 썩은 사과에 맞아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 하며 죽음을 맞게 되고, 그 후 남아있는 가족들은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을 품고서 교외로 소풍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부분의 고전(古典)이 그렇듯 작품의 방향성을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으며 이 걸작 역시 그렇다. 아무리 이 작품을 읽고 많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나’자신과 대화하면서 ‘나’에 대한 탐구에 소홀히 했다면 즉 ‘내가 나에 이르지 못하는 한’ ‘좋은 삶’에 이르지 못한다.

카프카는 왜 자신의 주인공을 벌레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던져 놓았을까? 왜 사람들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레고르는 변한 것일까? 내가 혹은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변신’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사람이 벌레가 되다니? 별난 이야기지만 우리들도 한 번쯤은 벌레가 된 적이 있었을게다. 대학교에 응시해 떨어졌을 때, 이혼을 하고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 왔을 때, 직장에서 부당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버티고 버티던 사업체가 부도를 맞고 하루아침에 빈 털털이가 되었을 때. 온갖 약속과 깨알 같은 규칙을 지키면서 24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이 맞이해야만 하는 그런 아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몸은 무겁고, 시간은 자꾸 나를 떠밀고, 해야 할 일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고, 그렇지만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느낌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정을 지켜야한다는 무게감과 그게 바로 나를 세우는 나다움이란 압박감은 감당하기엔 버겁고 무시하기엔 꺼림칙한 중력으로 삶의 핵심(core)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레고르가 던진 질문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꼬박 꼬박 출근 시간을 지켜가며 회사에 가서 겨우 서류 속 숫자나 확인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 빚이나 갚으라구? 도대체 왜 나는 이 일을 계속하는 거지? 누군가의 아들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이 사회의 일부분으로 사는 게 일생일까?

일벌레에서 밥벌레로의 변신. 문득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벌레’아닌 ‘인간’으로 살아왔지만 인간의 자리가 무너졌을 때 역설적으로 ‘나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아버지란 누구인가?’를 깨달으면서 죽어가는, 자의식을 가진 한 인간의 이야기이며,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는 환타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리얼리티이다.

‘세상은 춥고 어두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라는 불안감에 빠졌을 때 우리는 자신을 확실하게 보호해 줄 무리를 찾아 기어들어가게 되는데 그 가정(가족)이란 무리는 “어떠어떠함 즉 외모나 성격, 재능,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음’ 그 자체 때문에 존재의 기쁨을 맛보는 장소이어야 하지 ‘자유를 억압하고 ’나‘를 황폐화 시켜 가두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레고르가 ‘일’을 못하게 된 벌레가 된 뒤로 “그의 방은 더듬어 보고 싶은 유리 액자가 있고 실바람이 흘러오는 작은 틈을 가진 창문이 있고 오래된 먼지가 붙어 있는 구석을 잇는 별스런 놀이터가 된다.” 겨우 세일즈맨에 불과했던 그가 자기 자신을 규정해 왔던 상식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전에 없던 감각이 살아나면서 온 사방의 벽을 즐기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변신이란 무엇보다 ‘해야만 하는 일’, ‘있어야만 하는 것’ 약속된 모든 규범 즉 삶의 척도로 부터의 결별이다. 일상 속에서 관계에 대한 경중이 바뀌고 일과 사물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 것은 변신의 다른 증거다.

그레고르는 ‘변신’내내 무시와 배제에 내몰리는 것 같지만 그런 와중에 “특히 그는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한결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으며(중략) 그러다 보면 거기 꼭대기에서 빠져 있는 거의 행복한 방심 상태에서 더러, 그 자신도 깜짝 놀라 떨어져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즐거움을, 자유를 주는 것은 과거에 아끼던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조건이 허락하는 새로운 자유를 향한 행위의 탐색과 실행이었다. 자신에게 “기존의 규정에 얽매이지 말 것, 다시 삶을 원상복구하려하지 말 것, 지금 주어진 상태에서 기쁨을, 만족을 찾을 것.” 이 명령의 자유로운 실천의 장에서 그레고르는 변신이 가져온 ‘평안의 순간’을 체험한다.

실제 카프카의 모습을 그린 루이스 스파카티의 그림

『변신』은 ‘내 껍질을 깨기 위한 삶의 도구이자 자유의 방편을 탐문’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세상을 만나는 방식을 흉내 내면서 내가 세상과 접촉하는 방향과 방식을 비틀어 벗어나려 애써보는 일이다. 이제까지 만지작거렸던 ‘그레고르’로부터 변신하여 또 다른 ‘그레고르’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럼 어디로 또 가볼까? 이렇게 계속 『변신』을 만지작거리면서 나의 읽기를 떠나 보자. “너는 누구냐?”는 그런 물음에, “자기 앞에 선 낯선 나를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 “나는 늘 변신하니까.”라고 질문하면서....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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