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동물원 뒤 내리는 '봄비'
니체의 동물원 뒤 내리는 '봄비'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5.1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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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낙타에서 사자, 그리고 다시 아이가 되는 변화

“나는 그대들에게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어린이 날이자 연휴 첫날 비바람 소식이 들려오더니 흡족한 봄비가 내렸다. 가뭄이 지속되었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손자와 함께 가고자 했던 대전 오 월드 동물원 사파리는 다음으로 미루고 아들내외는 실내 과학관으로 일정을 바꿨다. 난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빗속에서 기억의 분실물 창고에 숨겨져 있던 ‘니체의 동물원’을 생생히 떠올리며 찾아 나섰다.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초판을 겨우 40부밖에 찍을 수 없었던, 불우한 운명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지난 100년간 여러 층위의 많은 독자들이 만지작거려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니체는 이 책에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이란 부제를 달아놓았다. 난 이 책을 읽으며 늘 기존의 번역과 해설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니체의 사유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 다르거나 잘못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난 그것도 이 책을 자기화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용감하게 받아들인다.

삶의 노정 속에서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이란 삶의 충일한 기쁨으로 충만한 순간, 창의와 도약의 찰라, 논리와 분별을 넘어선 사랑의 성취에 대한 은유이다. 사람마다 가슴에 품은 춤추는 별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에 저마다 자기 안에 ‘피를 흘리는 산고’의 혼돈을 품고 살며, 이걸 재료로 ‘자기만의 운명’을 빚는다.

춤추는 별을 빚는 필요성분은 피와 땀과 눈물일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은 창조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의 편견과 통념들, 우리의 의지에 강제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와 관습과 싸우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춤추는 별의 삶’을 찾아서 ‘혼돈’을 견뎌내야만 하는 우리를 또 다른 ‘망치’를 들고 ‘니체의 동물원’으로 데리고 간다.

니체는 ‘정신의 세 가지 변신’을 말하는 니체의 동물원에 먼저 “인내심 많은 짐깨나 지는 짐승”으로 낙타를 아주 친절하게 소환한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사막을 걷는데, 오아시스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끄떡없이 걷는다. 낙타의 무릎을 보신 적이 있나요? 주인이 명령하면 기꺼이 무릎을 꿇는 동물인데, 인간 속에 뿌리 깊이 박힌 노예근성을 은유하는 것이다. 복종이 곧 그들의 능력이다.

‘짐깨나 지는 정신’. 니체는 낙타로 상징한다. 낙타는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는 정신이다. 어떤 불의한 명령 앞에서도 그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한없는 수고와 피로감, 무거운 짐(기존의 가치)을 근거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질문을 잃어버린 자기무력감. 누가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니체는 이제 왜 나는 낙타일 수밖에 없는지, 왜 나는 삶의 충만한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렸는지 의심하며 니체의 동물원에 ‘사자’를 초대한다.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기에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이 곧 사자이다. 사자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이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건 아니기에 싸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전쟁’을 “거대한 용과의 일전”이라 표현하는데, 용이 상징하는 건 “너는 해야 한다!(Thou shalt)”는 의무와 당위의 목소리이다. 이를테면 도덕, 법, 관습이나 제도의 목소리 같은 것들...주어진 명령에 대한 거부 곧 그들의 능력이다!

하지만 이제 낙타에서 변신한 사자의 정신은 거대한 용에 맞서 싸운다. 사자는 “나는 하고 싶다(I will)”라는 능동적 의지에 제 삶을 비끄러매는 자들이다. 이것은 “나는 더는 하지 않겠다.”라는 말로 싸우겠다는 선언이다. 사자는 용에게 “나는 싫다. 나는 원하는 게 따로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자는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가치”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획득하고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투스트라는 ‘어린 아이’로의 변신을 말한다.

아이들이야말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배고프면 울고, 졸리면 자고, 그렇게 배부르고 푹 자고 나면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을 뿐이다. 그런 아이들을 지배하는 도덕이나 법률, 제도로 재단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심지어 용을 보고도 웃는다. 어떻게,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 때 보면 그렇다. 금방 치고 받고 싸우면서 울고불고 하다가도 잠시 후면 깔깔대고 웃으며 장난치고 논다. 망각이 곧 그들의 능력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위의 방랑자

낙타와 사자의 눈은 망각이 없기에 순진무구하지 않다. 굴종적인 낙타는 잊지 않고 기존의 억압과 삶의 고단함이 부여한 관점의 노예가 되고, 반항적인 사자는 그것에 반하는 한 개의 관점(눈)만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는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고 그 의미 안에 갇히고 만다.

이에 반하여 망각을 통하여 아이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때마다 다르기에 바라보는 세계와 사물과 사건이 순간마다 새로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이 순간마다 관점을 바꾸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유희정신이다. 그냥 웃을 뿐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세계는 언제나 신나는 놀이터이며 사자의 적수였던 용(Dragon)마저도 아이에게는 장난감이 되고 만다. 어린아이는 늘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며 “새로운 시작,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와 자기의 삶에 열중한다. 하여 어린아이는 기존의 세계를 상실하고 무로부터의 창조 즉 놀이의 창조적 거룩함에 도달한다.

커피향도 빗속에 녹아들어 다른 맛으로 태어난다.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내장”해야 한다. 낙타의 정신을 지니고 노예처럼 살던 사람도 자기 안에 감춰진 사자의 정신으로 깨어난다.

그 후 또 다른 정신의 변신을 통해 ‘용감한 부정’을 하며 자기의 존엄을 드높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안에 있는 아이의 유희정신으로 깨어나 자기극복의 인간으로 변모한다. ‘니체의 동물원’을 빠져 나오니 여전히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봄비는 단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있다.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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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봉 2023-05-31 17:20:30
잘 읽었습니다.
책의 제목만 알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 많이 얻어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