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앵청이', 나루터에서 애틋한 사랑 나눴다
처녀 '앵청이', 나루터에서 애틋한 사랑 나눴다
  • 윤철원
  • 승인 2022.09.20 19: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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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태양십이경 돋아보기...제1경 '앵진귀범'(鶯津歸帆)
돛단배 자유롭게 오가던 곳, 반곡마을보며 유유히 떠나가던 배
앵청이 나루에서 바라다본 지금의 반곡동. 유유히 흐르는 물길이 옛 모습을 회상케한다. 

앵진(鶯津)은 앵청진(鶯聽津)의 줄임 말이다.

직역하면 ‘꾀꼬리 소리 들리는 나루’라는 뜻이다. 앵청이 나루라고도 불렀는데 수루배마을 3단지 강 건너 맞은편 전월산 자락에 있는 양화 취수장 일원을 말한다.

반대쪽은 햇무리교에서 상류 방향 약 200m 지점에 나루가 있었는데 반곡나루(또는 앵청이 나루)라고 불렀다. 금남면 반곡리와 남면 양화리를 이어주던 이 나루터는 1970년대까지 운영되었으나 시내버스가 시골까지 운행되던 1980년대 들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과거 금강의 돛단배는 서해에서 부강포구까지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그러다가 1934년 금남교가 개통되면서 돛이 높은 배는 통행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남교 개통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평소 이용에는 지장이 없으나 홍수가 나면 다리가 물에 잠긴다’고 했으니 서울의 잠수교처럼 교각 높이가 낮았던 것 같다.

이 시를 지은 시기는 금남교가 개통되기 훨씬 이전이었기 때문에 돛단배가 물길 따라 자유롭게 오르내렸을 것인데 작자가 살던 반곡마을에서 바라보면 유유히 떠가는 돛단배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세종시 지역에는 모두 20개소의 나루가 있었다. 금강 15개소, 동진강(구 미호천) 5개소 등이다. 이들 나루는 강을 건네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서해로부터 운반된 해산물이나 소금을 보급하는 거점으로서, 그리고 나루터 인근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어촌으로 실어 보내는 선적지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앵청이 나루 인근에도 세종리(양화리, 진의리, 월산리), 반곡동(반곡리), 집현리(석교리), 소담동(석삼리)과 같은 큰 마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루터 교역이 활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시를 감상해본다.

앵진귀범(鶯津歸帆 앵청이 나루로 돌아오는 배 )

순풍여전왕래시(順風如箭往來時 순풍에 쏜살같이 배가 오고 가는데)

앵헐오제원객비(鶯歇烏啼遠客悲 꾀꼬리 숨고 까마귀 우니, 먼 길 떠난 나그네 서글퍼지네.)

도두탄항쟁류처(島頭灘項爭流處 섬 어귀 여울목엔 물결 흐름 빠르고)

가자어아대회기(賈子漁兒大會期 상인과 어부들 많이 모일 시기라.)

회로섬수추상조(路回剡水秋霜早 섬계로 가던 길엔 가을 서리 벌써 내렸고)

지전초강모우지(地轉楚江暮雨遲 초강에 돌아드니 저녁 비 부슬부슬.)

취중수효원굉벽(就中誰效袁宏癖 그 가운데 원굉 버릇 닮은 이 누구인가?)

재래월정호영시(載來月汀好咏詩 달 비친 강가에서 시 읊음이 좋구나.)

앵청이 나루 위치

첫 구절, 순풍과 왕래라는 표현에서 배(舟)가 생략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앵청이 나루 앞 금강을 오르내리던 돛단배들이 순풍을 만나 미끄러지듯 내달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둘째 구절, 한동안 청아하게 울어대던 꾀꼬리 소리가 멈추고 그 대신 까마귀가 울어 대는 모습을 그리면서 나그네의 시름에 찬 심정을 표현했다.

셋째 구절에서는 물흐름이 빠른 여울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넷째 구절의 가자(賈子)는 상인으로, 어아(漁兒)는 어부로 해석함이 좋을 듯하다. 상인과 어부가 많이 모여들 것이라 하였으니, 추수가 끝나고 김장철을 앞둔 시기인 듯하다. 나루마다 배들이 서해에서 올라 온 새우젓과 소금을 하역하고, 미곡상들은 주변에서 매입한 쌀을 배에 싣는 광경을 그린 듯하다.

다섯째 구절은 중국의 세설신어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겨울밤 함박눈 쏟아지는 멋진 설경에 반해 술 마시며 시를 읊다가,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와 함께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배에 올라 친구를 찾아가던 중에 술이 깨고 흥도 사라져서 그냥 되돌아갔다는 것인데, 이러한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볼 때 작자도 어느 서리 내린 가을 이른 아침에 친구를 찾아 나섰다는 표현을 한 듯하다.

여섯째 구절, 초강(楚江)은 부강리에서 합강에 이르는 금강 본류를 말하는 것이다. 세종시를 관류하는 금강은 과거에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부강에서 합강까지는 형강(荊江), 부용강(芙蓉江), 초강(楚江) 등으로 불렀고, 합강에서 전월산을 지나는 곳은 삼기강(三岐江)이라고도 하였다.

초강이 등장한 것으로 볼 때 부강 근처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일토록 친구와 회포를 풀고 저녁 무렵 돛단배로 집에 가던 중 보슬비를 만난 모양이다.

일곱째 구절, 원굉(袁宏)은 중국의 동진 사람이다. 시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나 젊은 시절 뱃사공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배를 저으며 영사시(詠史詩)를 읊는 버릇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상(謝尙) 장군에게 발탁되어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처럼 작자도 배에 오르면 시 읊는 버릇이 있다며 자신을 원굉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 강가에 어른거리는 달을 보니 시흥이 절로 넘쳐난다며 자연을 노래하는 즐거움이 좋다는 표현으로 시를 마무리하였다.

앵청이 나루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양화취수장 전경

먼저, 옛날 이 나루에 앵청이라는 처녀가 살았다고 한다. 앵청이는 해산물을 싣고 금강을 오르내리며 장사하던 어느 총각에게 반해서 장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었던 모양이다. 앵청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총각은 어느 날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서해를 향해 떠났다.

앵청이는 총각이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과 사모하는 마음이 사무쳐 나루터에 주막을 짓고 수절하며 기다렸으나 결국은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그 후 사람들이 앵청이 나루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 진다.

다음은 앵청이 나루 인근에 앵소(鶯巢, 꾀꼬리 둥지)형 명당이 있었기 때문에 앵소나루라고 부르다가 앵청이나루로 변했다는 설이다.

어쨌거나 앵청(鶯聽)과 앵소(鶯巢) 글자 뜻만 본다면 주변에 꾀꼬리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홀로 웃어 본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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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윤 2022-09-22 17:34:16
어려운 한시의 해설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인은 어린 시절 1950년대 반곡리에서 양화리로 보리를 찧고 밀을 빻으러 금강 앵청이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 땐 먹고 사는 일이 큰일었는데 이런 시적 감흥이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석유 등잔 생활의 농촌에서 대 학자의 어려운 한시를 읊으셨으니 감개무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