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25, 비참했던 전쟁, 영원히 기억하리
아! 6.25, 비참했던 전쟁, 영원히 기억하리
  • 조한수
  • 승인 2013.06.2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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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 칼럼]민간인 사상자마 100만, 이 전쟁은 계속된다

올해로 전쟁발발 63주년을 맞는 한국 전쟁에는 뉴질랜드의 용감한 키위 용사들이 3년의 전쟁 기간 동안 무려 6000여 명의 군사들이 파병됐다. 당시 뉴질랜드의 인구라고는 겨우 200만 명 정도의 숫자였다. 이들의 용감한 참전 역사는 경기도 가평지구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그래서 가평군에서는 이들의 역사를 감사하는 마음에서 무려 너비2.5m 정도의 크기와 2톤이 넘는 화강암 자연석에 “영원히 기억하리”라는 한글로 기입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가면 항구 가까이에 바다를 내다보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Rose Garden(장미공원)이 있다. 거기에 이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매년 한국 전쟁 정전일인 7월27일과마다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키위 참전용사들은 이 기념비 앞에 모여서 한국전에 대한 회고와 이미 작렬하게 산화한 전우들의 넋을 기억하는 기념식을 갖고 있다.

필자는 올해 정전 60년을 맞는 이 시점에 있어서 한국 전쟁을 회고하면서 오늘의 우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전쟁이 휴전상태에 있는 분단국이다. 그런데 이 휴전이 60년이라는 가히 놀랄만한 긴 시간을 갖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휴전 기간이 이토록 길다보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전쟁의 휴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민간인 사상자만 1백만명에 달한 6.25 전쟁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비극의 역사이다.
한 마디로 삶의 긴장이 이완되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결과는 고스란히 삶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멈춘 것은 60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전쟁은 진행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잠시 한국전쟁이 휴전될 상황을 역사의 타임머신으로 돌아가 살펴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1951년 10월25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재개되었으나 포로 교환문제가 걸림돌이 되어서 진전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의 마오쩌뚱이 쉽게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뒤로도 이 전쟁은 2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1952년 10월,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는 철의 삼각지대였다. 10월6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15일까지 무려 열흘 동안, 높이 395m의 산봉우리에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그야말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다. 무려 그 산봉우리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고 1만 4천여 명에 가까운 군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쏟아진 포탄만 해도 무려 30만방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방에서의 전쟁이 치열할 동안, 후방에서는 별별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리산에 들어가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도주로가 차단되자 양민들을 학살되었고, 남원군 운봉지역 같은 경우에는 휴전이 될 때까지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과 빨치산들의 세상이 되어서 무고한 양민들만 중간에서 희생당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에 피난 가있었던 정부와 국회에서도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져 그야말로 온 나라 안은 벌집을 쑤셔 넣은 것 같이 정신들이 없었다.

당시 대구에는 전체주민인구가 26만9천명 쯤 되었는데 1.4 후퇴로 인해 16만 8천 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이 그 작은 도시에 몰려들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즈음에 전선은 점점 교착상태에 빠져서 대치상태에 있던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무의미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친 김일성은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중국의 마오는 귀를 막고 또 다른 공격으로 전쟁의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중공군 사령관 펭도 ‘중공군 희생이 너무 크니 그만 휴전하자’고 제의를 해도 마오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마오의 숨은 계획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미래의 판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국전을 최대한 지렛대로 활용하여 소련으로부터 필요한 군사기술과 군사원조를 받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0월25일부터 판문점에서 재개된 회담에서 양측은 군사분계선 설정, 포로교환 등 5개 의제를 합의했지만, 북측에서는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 포로의 전원송환’을 주장했고 유엔군 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의 자발적 송환’ 원칙을 제시했다. 실제로 남한출신 인민군과 장개석 중국 정부군 출신으로 전쟁에 끌려온 중공군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이 많았다.

이러는 사이 유엔군은 휴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평양을 집중적으로 폭격하여 폐허의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사이 당시 미국에는 한국전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2차 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이 53년 1월에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고, 그해 3월 6일 소련의 철권 통치자였던 조셉 스탈린이 29년간의 권좌 끝에 73세로 사망하면서 미소양국에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 유엔군 측의 휴전회담 주역은 C.T.Joy장군과 백선엽 장군이었고 공산진영에서는 중공군 총 사령관인 펭과 북한군 남일이었다. 공산측은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모두 송환한다. 원치 않는 포로의 송환을 위해 폴란드,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포로를 이관한다’는 8개항을 유엔군 측에 제시했다. 6월4일 양 측은 이 안을 토대로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 후 2개월 내에 송환을 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90일 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합의를 보지 못한 포로들에 대해서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으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모두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 않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2만6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전격적으로 석방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속에 1953년 7월27일에 휴전협정은 맺어졌다. 포로교환 때 상당수의 미군 배신자들은 끝까지 북한에 남았다.

이 전쟁으로 유엔군 18만 명,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사망했다. 남한은 민간인 사망자만 100만 명에 이르렀다. 정식으로 전쟁선포를 하지 않고 치른 한국 전쟁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이 흘린 피가 가치 없는 것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NLL의 진실공방과 국정원과 경찰의 대선 공작 사건이 그것이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를 먹는 나무이다. 이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이 나무를 심기 위해 뿌린 피의 거름과 민주시민의 정직함이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이 나무를 지키지 못하면 언제라도 전쟁은 또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다시금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위정자들이여! 이 땅에 흘린 피를 제발 욕되게 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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