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평 전투, 그리고 우방이란
아! 가평 전투, 그리고 우방이란
  • 조한수
  • 승인 2013.06.1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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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 칼럼]뉴질랜드 참전용사가 들려준 '6.25 이야기'

6월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을 기념하는 ‘현충일’과 가슴 아픈 6.25 동란 63주년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사이 십대 아이들은 6.25전쟁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교육이 부실하다는 반증이다.

역사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현실은 방종에 빠지게 되고 역사를 모르는 자의 미래란 뜬 구름 잡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하기에 역사를 모르는 세대에게서 미래의 소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버릇없는 강아지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허황된 꿈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많은 역전의 6.25참전 용사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피가 값지게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필자가 오클랜드에서 약 280Km 떨어진 인구 10만의 소도시인 타우랑가라는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하며 지낼 때에 만났던 어느 노인을 잊을 수가 없다.

   가평전투의 뉴질랜드 군인 참전 기념비
그는 62년 전에 가평 전투에 참여했던 분으로 그때 당시 배웠던 한국어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가 필자를 보자마자 반갑게 한국어로 “반갑습니다. 저는 가평전투에 참여했던 용사입니다”라고 소개를 한다. 그러면서 필자가 일하고 있던 선교사무실을 방문하여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들려준 가평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중공군 5차 공격 때인 1951년 4월 23일 경, 뉴질랜드 포병대 제 16야전여단은 북한강을 배수진으로 친 가평지구에서 한국전쟁사에 빛나는 큰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당시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펭이란 자는 봄의 해빙기를 맞아서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중부전선 임진강과 화천 파로호 사이에 배치된 중공군 10개 군단을 중심으로, 서부전선 개성 쪽에는 북한군 1사단, 그리고 동부해안 쪽에는 북한군 3사단과 5사단을 가세시킨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중 중공군 3개 군단 병력27만 명이 서울로 진격해 들어갈 때 박격포대를 갖춘 ⅩⅢ(39,40) 군단은 가평 쪽으로 내려가고, Ⅸ군단(27,20)은 영국군을 격퇴하고 미24사단을 저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51년 4월 17일 경, 뉴질랜드 포병대는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인 가평천 지류인 가림 계곡에 자리를 잡고 전방에 나가있는 국군 6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의 삼각지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와이오밍 라인에서는 장도용 장군이 이끄는 국군6사단(19연대,2연대,7연대)이 중공군 60사단으로부터 큰 공격을 당해 어려움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던 가평계곡의 뉴질랜드 포병대 무디 여단장은 국군이 버텨줄 것으로 믿고 그 날 저녁에 포대원들을 취침시켰다. 그러나 23시경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던 수많은 국군들이 아비규환으로 뛰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일로 뉴질랜드 포대는 뒤로 물러난 내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05mm곡사포 9문을 갖고 있던 미987AFA 대대와 로켓포 2문을 갖고 있던 미2 로켓 FA포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당하기 직전에 장비를 모두 버리고 몸만 겨우 빠져 나와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 Ⅸ Corps지휘관인 Hoge장군이 영국군 여단장에게 뉴질랜드 포병대를 전진 배치시켜서 캔사스 라인으로 진격할 국군을 지원하라고 지시를 내려서 통신망도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뉴질랜드 포병대는 가남리라는 계곡에 배치가 되었다. 그리고 미군 213AFA포대는 신당리에 각각 포 위치를 잡고 있었다.

당시 길가에는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녁 6시경이 되자, 중공군 60사단이 저돌적으로 공격해 오기 시작하여 캔사스 라인이 있던 국군을 넘어 가평 쪽으로 전진했다. 저녁7시에 뉴질랜드 포대는 후퇴하라는 명령에 저녁8시 30분경에야 피난민과 국군 사이를 빠져나와 다시 내천에 포 위치를 잡았다. 그 뒤에는 미들섹스 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철수한 미213AFA대대도 급히 포를 재조립하고 있었다.

한편, 뉴질랜드 포대가 가평계곡 아래로 간신히 빠져 나올 때 포대 지휘관들은 호주, 캐나다군 진영으로 가고 없어서 도널드 스코트 중위와 데니스 필든 중위가 관측임무를 맡고 무전병을 데리고 호주군 진영으로 가면서 그들과 무전연락을 시도했지만 사이에 낀 지형에 막혀서 연락두절상태였다. 물론 전화선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저녁 9시 반 경, 중공군이 호주군을 공격했지만 다행히 일차 공격은 잘 막아냈다. 하지만 한 시간 후에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격에 호주군은 밀려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자정쯤에 다시 전개된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서 관측진지에 있던 필든 중위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뉴질랜드 포병과 미국의 포병들은 밤새 포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어서 중공군의 공세는 한층 강화가 되었다. 이때 내천에 있던 뉴질랜드 포병들도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중공군들이 포 근접까지 쳐들어온 것이었다. 밤새 서로가 아비규환 같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

날이 새자, 뉴질랜드 포대는 다시 포24문을 모두 청천리에 배치하여 좁은 계곡을 뚫고 내려오는 중공군을 맞아 아침 7시부터 포격을 가했다고 한다. 오후3시경, 작전을 바꾼 중공군이 전방중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공격해오자 뉴질랜드 포병도 big day out를 벌였다. 얼마나 포를 쏘아댔던지 포탄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수송대가 피난민 사이를 뚫고 바쁘게 포탄을 실어주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94명의 사상자 중 32명이 전사하면서 버티던 호주군은 비록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중공군 코를 비틀고 있었고 기술적으로 후퇴할 때는 1명만 전사하고 무려 중공군 39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포위 격리한 상태에서 먼저 호주군을 상대해 온 것이다.

크게 호주군을 물리친 중공군이 이번에는 캐나다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밤 11시 30경에 벌어진 중공군의 총공세는 그 일대를 마치 도살장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산발적인 포격으로 중공군 71명이 사살되었다. 새벽2시에 다시 개시된 중공군의 공격은 뉴질랜드 포병으로 하여금 소총을 들고 나가서 전투하게 만들었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4월25일 아침, 탄약과 보급품을 공수받은 뉴질랜드 포병은 가평전투에서 중공군 1천명을 죽이고 3천명을 부상시킨 전과를 올렸다. 그 날은 마침 1차 세계대전 때 터키 갈리폴리 전투에서 당한 뉴질랜드 -호주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ANZAC Day(뉴질랜드 현충일)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맞고 있다. 위대한 용사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역사를 알려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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