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1백명으로 소정역 습격, 일제 간담 '서늘'
의병 1백명으로 소정역 습격, 일제 간담 '서늘'
  • 윤철원
  • 승인 2020.11.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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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독립운동]<상> 의병장 임대수 활약... 소정리역 습격사건 주도
조선인 밀고로 작전에 차질...장군면 태산리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서 부당한 합병에 항의하는 민초들의 시위가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세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12년 출범한 세종시 역사는 일천하지만 연기군 시절부터 면면을 이어온 지역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분연히 생을 던진 투사들도 많이 나왔고 그들의 활약이 오늘의 행정수도 세종으로 이어지게 됐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윤철원 연기향토연구원을 통해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씀

의병장 임대수,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나라가 일제에 병탄을 당한 후 전국적으로 많은 독립선열들이 일어나 한민족의 기개를 굽히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그분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고, 그 독립정신이 오늘까지 이어져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헌신한 독립선열들에 대한 감사를 잊고 그분들의 노고마저 외면하려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세종시 지역에서 벌어졌던 독립운동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임대수 의병장의 활약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경계하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해양세력은 동북아에서 일본의 외교적 우위와 침략야욕을 묵인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일제는 대한제국에 다양한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불법적인 외교협약을 체결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을사조약(1905년)과 정미조약(1907년)이며 불평등 조약을 바탕으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대한제국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으나 민초들은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며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시국정세에 따라 세종시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투쟁한 사례가 있었다. 세종시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은 그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수백 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파악된 의병은 임대수(林大洙, 연기군 남면 송담리), 권정남(權正南 일명 權主事, 연기군 남면 당암리), 임사일(林仕日, 불명), 신녕칠(申寧七, 조치원지역 활동), 이건한(이건한, 장군면 태산리), 이은정(장군면 태산리), 김공빈(金公斌, 불명) 등에 불과하다. 이들이 세종시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9월부터이다. 세종시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조치원에 일본헌병대와 경찰이 주둔한 관계로 활발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와 같은 여건 속에서도 여러 기록에서 의병이 활약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기록에 근거한 세종시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약상이다.

소정역 구역사 모습(출처:디지털세종문화대전)

▣ 소정리역 습격사건

1907년 9월 3일 오전 9시, 임대수가 이끄는 의병 100여명은 전의군 북면 소정리에 위치한 소정역을 습격하고 이를 불태웠다. 의병이 습격했다는 급보를 받고 일본경찰 2명이 전의 읍내로부터 달려왔으나 의병들은 이미 두 갈래로 나뉘어 50여 명은 천안 목천 방면으로, 20여명은 온양방면으로 사라진 뒤였다.

▣ 연기군 남면 복룡마을(진의리) 전투

1907년 11월 7일, 의병 30여 명이 남면 진의리 복룡마을(일명 백동)에 모여 조치원 헌병대 연기분파소(分派所)를 급습할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당시 남면장이 연기분파소에 밀고하였다. 신고를 받은 연기분파소 순사 바바[馬場恒雄]와 다카하시[高橋公政]는 이 사실을 조치원역 수비대에 보고하고 즉시 출발하여 오후 3시 30분경 의병이 집결해 있는 복룡마을 뒷산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은 작은 능선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바는 동쪽 능선으로, 다카하시는 북쪽능선으로 올라가 의병을 향해 사격을 가하자 불의의 총격을 받은 의병대도 이에 응전하였다. 그렇게 약 40여분의 시간이 흐르자 일경들의 탄약이 거의 소진되었다.

일제는 이 교전에서 바바가 칼로 의병 2명을 죽이고 화승총 1정을 노획하였다고 보고했으나 사실은 무고한 양민을 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안세무관으로 근무하던 조한벽은 “이날 교전에서 무고한 양민 2명이 총에 맞아 횡사하였는데 불쌍하고 측은하기가 한이 없다”고 보고한 내용은 일제의 만행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복룡리(구, 진의리 백동마을) 위치도

여하튼 탄약이 떨어진 바바와 다카하시는 연기분파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조치원에서 파견된 보병대를 만났다. 보병 제47연대 제9중대 소속 마쓰이[松井常次郞] 소위가 인솔하는 병사 18명과 간호병 1명 외에 일본인 순사 3명과 한국인 순사 2명이 연합한 보병부대가 복룡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의병이 후퇴한 뒤였다. 일본 경찰대는 주민들로부터 도주한 경로를 조사하여 연기 학천(鶴川)에서부터 공주 갈산(葛山), 두곡(杜谷), 입석(立石)까지 추적하였지만 공주 당곡(堂谷)에서 의병의 종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한편, 특무조장 후카미[深水壯馬]가 이끄는 기병 10명도 순사 요시미[吉見淸次郞]를 수행하고 연기에서 우회하여 의병을 추적하였으나 역시 당곡에서 종적을 잃고 귀대하였다.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복룡마을은 임대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종적을 감춘 당곡은 바로 권정남의 출신지였다. 따라서 이 전투를 수행한 의병은 임대수 의병과 권정남·임사일(林士日) 등이 이끄는 의병연합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 장군면 태산리 전투(1911년 6월 16일)

1910년 나라가 일제에 병탄된 후 전국의 의병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충남일대를 돌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임대수와 권정남도 마땅히 몸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들은 연기군 남면 송담리와 당암리 출신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의기가 투합했던 인물들이다.

덕천군사우 관리사(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1907년(정미년)부터 의병활동을 시작해서 각각충청도 일대를 돌며 눈부신 활약을 했던 의병대장들이었지만 한일합병 후 일본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쫓겨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장군면 태산리에서 만나 회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밀고자가 있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1911년 6월 16일, 한적한 태산리 마을에 일본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쳐 마을주변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의병들은 재빨리 덕천군 재실 담을 뛰어 넘어 마루 밑으로 몸을 숨기고 상황을 보아가며 은밀하게 그곳을 빠져 나가려고 했으나 일제의 수색에 발각되고 말았으며 격렬한 총격전 끝에 임대수와 권정남 등 6명의 의병은 그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임대수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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