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지면 그리운 사람들
더워지면 그리운 사람들
  • 강신갑
  • 승인 2013.03.12 0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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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시인 강신갑의 시로 읽는 '세종']딸아이의 낭랑한 목소리...
  어디에서 살고 계시는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보고 싶습니다.(문 앞 계단에 핀 꽃)

 

더워지면 그리운 사람들

 
   기온이 삼십 도를 넘는 혹서의 날씨에 퇴근한 나는 집에 도착하여 대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딸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새어나온다.
   "응. 아빠다."
   대문이 열리고 하얀 진돌이가 어찌할 줄 모르며 넘실댄다. 정원에 피어있는 백일홍이 빵끗 웃는 모습으로 고개를 움직이고, 호박넝쿨이며 더덕 줄기가 실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와 컴퓨터를 치던 아들 그리고 책을 보던 딸이 현관에 나와 반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의 신혼 초에는 사글셋방을 얻어 살았었다. 그 집은 벽돌블록을 쌓고 슬레이트를 얹어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딸린 집이었다. 아내가 시집올 때 내가 아무것도 못 해오게 한 탓으로 신혼살림이라야 장롱과 석유곤로가 거의 전부이다시피 했던 그때의 여름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더웠다. 저녁이면 천장에서 뿜어대는 열기와 하루 종일 달아오른 벽체에서 풍기는 뜨거움이란 선풍기 바람조차 후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열대야를 극복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모기장을 치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잠을 청해야 했다. 방바닥조차 뜨거워 끈적거리는 곳에서 더위에 지쳐 뒤척거려야 했던 신혼의 여름밤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또 한 가지의 사유가 있었다.

   그때 살았던 셋방은 십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허름하게 대충 지어진 동일한 구조의 집이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어 벽지가 썩었고 습도가 높은 날에는 곰팡냄새도 났다. 이웃 간에 방음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심야나 새벽녘에 이웃집에서 성스러운 부부지정을 나누며 토해내는 영육교감의 소리가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 곤한 잠을 빼앗아 가기 일쑤였다.

   날이 밝을 무렵이면 이웃 주민들이 신문지나 화장지를 한 움큼씩 들고 화장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화장실은 두 개인데 그것을 이용해야만 하는 수요자는 줄잡아 이십 명을 웃돌았다. 순서가 되어 화장실에 들어가 앉으면 화장실을 푼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떨어뜨린 배설물에 의해 오물이 엉덩이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또한 집집마다 수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다섯 개의 공동수도가 울안 중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들과 세면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때로는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면 아기 돌이라서 또는 백일이라서 아니면 아저씨 생신이라서 등등의 이러저러한 일로 떡이라든가 정성이 깃든 음식물이 돌려졌다.
   "새댁, 이것 좀 먹어봐. 얼마 되지 않는데 새신랑하고 맛만 보면 될 거야."
   다정히 건네주시는 이웃집 아주머님의 접시를 받아들며 아내는
   "이거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어쩐대요."
라며 그 정성을 받아 우리 대접에 옮겨 담고 그릇을 깨끗이 닦아 돌려드리며
   "축하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말로만 인사를 건네야 했던 아내의 표정에서 베풀지 못하는 아쉬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반상회가 있는 날에는 집집마다 몇 푼씩 추렴한 돈으로 마당에서 세들어 사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여름밤을 살랐다. 그때 마셨던 소주는 정말 달콤하기만 했다. 그렇게 어울려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분위기가 고조되면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순서대로 노래를 불렀다. 어떤 사람은 노래 대신 등허리에 막걸리 통을 넣고 곱사춤을 추기도 하였다. 한 할머니는 그 춤을 보시고 배꼽을 빼시다가 숨이 막혀 며느리가 등을 두드려 숨을 트게 해드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어울려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환갑 안팎의 연세가 되셨을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연락이 된다면 애경사 시에라도 꼭 찾아뵙고 싶다. 아니,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 뵐 수 있다면 우리 집으로 모셔 삼겹살을 구우며 그 시절 이야기로 무더운 한여름밤을 식히고 싶다. 그 당시 백일이었던 아이와 돌잔치로 떡을 먹게 해준 아이는 어느새 건장한 또는 어여쁜 젊은이가 되었을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창문 밖 염천의 하늘을 바라본다. 눈을 돌려 마당을 보니 두 살 된 영리한 진돌이가 농구공을 굴리며 놀고 있다. 화단에 있는 토란 잎사귀에는 함께 살았던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비치고 지나간다. 어디에 사시더라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야 할 텐데······.

   "여보! 식사하세요. 오늘은 우리 화단에서 뜯은 상추에다가 삼겹살을 준비했어요."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지 아내가 생각에 잠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래요? 삼겹살!”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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