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의 아우내장터, 바로 이곳이었다
세종시의 아우내장터, 바로 이곳이었다
  • 곽우석 기자
  • 승인 2017.03.01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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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만세시위 '전의장터'에서 분출, 일제 탄압 가장 심하게 받아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면 세종시에는 '전의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전의장터 일대에 '만세길' 도로명주소를 붙여 놓은 모습>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면, 세종시(구 연기군)에는 '전의장터'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그해 5월까지 전국으로 확산됐다.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대전·충남 독립운동사적지 보고서에 따르면, 연기지역에서는 3.1 운동이 있은 지 정확히 12일 뒤인 3월 13일 전의면 소재 전의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펼쳐졌다.

이곳 독립운동은 연기 지역에서 일제의 탄압을 가장 심하게 받은 것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평이다.

만세시위는 이수욱(李秀旭)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는 2월 26일 상경해 3.1 운동을 직접 목격한 후 귀향해 신정리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3일 오전 9시경 갈정리고개(장고개)에서 시장을 보러가는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고, 12시 40분경 150여명의 군중들에게 연설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주창했다.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전의시장 각처를 활보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치원에서 헌병과 철도원호대원 20명을 출동시켜 진압했다. 이 만세시위로 이수욱 등 15명은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전의장터 만세시위운동 기념비 모습

현재 전의시장 일대 도로에는 '만세길'이라는 도로명주소가 명명되어 당시 독립운동을 기리고 있다.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는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어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인사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기념관 측은 "전의시장 현장에 안내판이나 기념표석도 설치해 독립운동 사적지로 보다 더 알릴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세종지역은 다양한 형태의 항일 운동이 전개됐다.

◆소정리역-임대수 의병 전투지

'소정리역'은 1907년 연기 출신 임대수(林大洙, 1882~1911) 의병부대가 전투를 치렀던 곳이다. 현재 소정리역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신축 건물이다.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임대수는 1882년 연기 남면 송담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대마저 일제의 책동에 의해 해산되기에 이르자 의병의 기치를 올렸다. 그는 50여명의 의병을 인솔해 은진에 있는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총기·탄약 및 서류 등을 탈취했으며 구금 중인 애국지사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후 1907년 8월부터 1908년 2월까지 공주·천안을 비롯해 청약·당진·보령 등 충남 일대에서 활약해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1907년 9월 3일에는 전의군 소정리역을 공격하고 역사를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1911년 6월 공주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민족교육 실시했던 '육영재'(毓英齋)

한말 연기지역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사립학교 '육영재'도 주목된다. 육영재는 연동면 송용리 결성 장씨 문중에서 세운 문중서당이다. 육영재, 송동숙(松洞塾), 육영의숙(毓英義塾)으로 불렸으며 1921년 기성학교로 변경하여 초등학교 과정을 교육했다.

 

   연기지역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사립학교 '육영재' 전경 <사진=독립기념관 대전·충남 독립운동사적지보고서>

육영재는 1925년 폐지될 때까지 한문·국사·지리 등의 교과목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처럼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1910년대부터 육영재를 이끈 장성휘(張星輝)의 영향이 컸다. 장성휘는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12년 대성학교가 폐교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육영재를 이끌었다. 육영재에서 사용했던 국사교재는 대성학교에서 사용했던 대조선사(大朝鮮史)였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육영재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장기만·장기복·장홍진 등은 연기지역에서 3.1운동을 전개했다.

육영재는 1876년 이전 중수한 건물이 현재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세종시 향토유적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치원 공립농업보습학교 학생운동지

조치원 공립농업보습학교는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고 식민지 교육현실에 저항해 동맹휴학을 단행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대동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자리다.

   현재 대동초등학교<사진> 위치에 자리했던 조치원 공립농업보습학교는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고 식민지 교육현실에 저항해 동맹휴학을 단행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1927년 10월 14일 이 학교 학생인 이종상(李鍾祥)이 일본인 교사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정학처분을 받자 10월 17일 학생들은 부당함을 주장하며 80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휴학이 10여일 지속되자 학교 측은 정학처분을 내렸던 이종상을 퇴학처분하고, 휴학을 주도한 학생 4명을 퇴학시켰다.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위를 추진하던 중 학생 3명이 체포되어 퇴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백정제사공장 동맹파업지

백정제사공장 동맹파업지는 1935년 백정제사공장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했던 공장이 있던 곳이다. 현재 조치원여중 건너편에 위치한 부지로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조치원여중 건너편에 위치했던 '백정제사공장 동맹파업지'는 1935년 백정제사공장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했던 공장이 있던 곳이다. <사진=독립기념관 대전·충남 독립운동사적지보고서>

1930년대 들어서 일제의 노동수탈과 전시물자동원을 위한 식민지 경제정책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수반했다. 일제는 1930년대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에서 군수물자를 싼값에 조달하기 위한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했다. 노동자들은 식민지 통치 권력을 이용한 인력동원과 수탈에 대항해 동맹파업으로 노동쟁의를 전개했다.

백정제사공장 노동자들도 1934년 2월 28일부터 남자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했으며, 3월에 들어서면서 여자노동자들에게도 확대되어 170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조치원역 운송인부 동맹파업지

조치원역 운송인부 동맹파업지는 1921년과 12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치원역 운송인부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한 곳이다. 현재 조치원역이 있는 부지로, 지금의 조치원역은 1999년 역사가 새로 신축됐고 2008년 증축됐다.

일제는 1920년대 들어서 식민지 경영의 독점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강요와 저임금에 시달렸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족차별과 일본인 노동자의 50% 이하 차별적 임금을 받았다. 이러한 억압과 모순이 지속되자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나 동맹파업으로 저항하게 됐으며, 연기지역에서는 조치원역 운송인부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했다.

   조치원역 운송인부 동맹파업지는 1921년과 12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치원역 운송인부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한 곳이다. 현재 조치원역<사진>이 있는 부지로, 지금의 조치원역은 1999년 역사가 새로 신축됐고 2008년 증축됐다.

1921년 6월 40여명의 화물운송 인부들은 화물 운반요금을 인상해 줄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실시했으며, 같은 해 8월에도 120여명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파업을 펼쳤다. 1929년 10월에는 일본인 화물계원이 항상 한국인 인부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가하는 것에 반발해 100여명의 인부들이 동맹파업을 펼치기도 했다. 조치원역 운송인부들의 동맹파업은 자신들의 경제적 권익보호 뿐만 아니라 민족차별에 항거해 일본인 자본가와 그들을 비호하는 일제 식민통지 권력에 대항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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