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세 번째 백제대제가 열리던 15일 오전 11시 30분, 천년고찰 비암사에는 아주 특별한 참석자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백제대제를 있게 한 장본인인 이재옥씨(80)였다.
이씨는 동국대 불교학과 2학년 재학하던 1960년 8월 주변에 있는 오래된 물건을 살펴보라는 여름방학 과제물을 받았다. 비암사 바로 옆 당시 연기군 연서면 쌍류리에 살던 그는 평소 자주가던 사찰 삼층석탑 위에 있는 시커먼 물체를 눈여겨보았다. 먹물과 창호지를 가지고 탑 위에 올라 바삐 탁본을 떴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동국대 황수영 교수에게 제출을 했다. 이게 비암사가 백제 부흥운동하다 죽은 유민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되었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계기가 되었다.
이씨의 첫 번째 탁본은 실패작이었다. 스님 몰래 황망한 가운데 탁본을 뜨다보니 이끼를 닦아내지 않아 거의 식별이 불가능했다. 이를 본 황 교수는 “다시해오라”고 지시를 했고 같은 해 가을 이씨는 스님이 출타한 틈을 타 이끼를 벗겨가면서 탁본을 뜨고 사진을 찍었다.
“저는 2학년 마치고 입대를 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서야 6세기 말에 백제원혼을 달래기 위한 명문이 들어있는 중요한 문화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살기 바빠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비암사에서 발견된 중요문화재는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 阿彌陀佛碑像)으로 국보 제 106호로 지정되는 등 백제 유민의 역사를 새로 쓰게 드는 엄청난 역사적인 가치를 지녔다. 황수영 박사를 이 탁본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불교 문화 연구의 대가가 되었다.
사실 이씨는 그 이후로는 아예 비암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의 탁본으로 인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지만 비암사 측의 원상 복구 요구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58년 전 기억을 되살리면서 “탁본이 끝나기도 전에 스님이 돌아오셔서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다” 며 “불교에서는 신성시하는 석탑에 올라가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으니 혼날 짓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 와보니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전혀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만 백제대제를 보니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죄송한 생각도 듭니다. 그 때 탑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게 비암사에 그냥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대학 졸업 후 잠시 불교관련 일을 하다가 서울, 대전을 거쳐 18년 전 공주시 정안면 쌍달리로 내려와 조상 묘를 돌보면서 노년을 보내는 이씨는 “당시 발견된 석불비상을 모셔다놓고 제사를 지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기억도 점차 까마득해지고 예전 비암사와 달리, 불사도 많이 해 너무 많이 변했다” 며 “살아있는 동안 몸이 허락한다면 매년 백제대제에 참석하고 싶다”고 약속했다.
주인공이나 장본인이나 ‘당사자', ‘중심인물’이라는 뜻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부정적일 경우에는 장본인을, 긍정적인 경우에는 주인공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