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용수산 봉수대 복원하자”
“연기 용수산 봉수대 복원하자”
  • 신도성 기자
  • 승인 2016.10.2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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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전 조치원읍장 “세종시 역사 복원은 중요한 일” 주장

 윤철원 전 조치원읍장이 청주 저성 봉수대 방향을 가리키며 조선시대 용수산 봉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청사 지역의 주산으로 우뚝 서 있는 원수산(元帥山)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반면, 바로 인근에 있는 용수산(龍帥山)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청주목 관하의 연기현에는 통신 수단인 봉수대가 연기현 용수산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600여 년이 지난 현재 용수산 봉수대는 산 정상에 넓은 터와 주춧돌로 추정되는 흔적들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시의 옛 지명을 연구하고 있는 윤철원 전 조치원 읍장은 “용수산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며 “세종특별자치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용수산 봉수대의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용수산 봉수대 터를 답사하기 위해 윤철원 선생의 안내로 임재한 세종시문화해설사, 김중규 세종의 소리 대표 등 일행 5명이 나섰다. 용수산은 지금은 정부의 토지 수용으로 사라진 월산리공단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의 흔적이 사라진 용수산은 온통 칡넝쿨이 휘감고 있었다. 용수산 정상 부근에는 SK텔레콤 중계소가 자리 잡아 차량 한 대가 오를만한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다.

등산을 겸해 천천히 주변 경관을 보면서 오르다보니 30여분 만에 해발 200미터 정도로 추정되는 용수산 정상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연기현조에 보면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수산 위에는 400~500평으로 추정되는 평평한 터가 있고 한쪽에 인공적으로 절개한 곳으로 보이는 커다란 암석 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5개의 봉화대가 설치할만한 넓이에다가 절개한 것이 분명한 돌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봉수대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윤 읍장의 안내로 용수산에서 동쪽 청주방향을 바라보니 청주 저성(은적산 봉수대. 단군성전 )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쪽의 공주 독성(공주 의당면 두만리 봉화산)은 나무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았다.

“청주 저성과 공주 독성 봉수대는 복원되어 후손에게 역사의 흔적을 보여고 있지만, 행정도시를 건설하면서 유서 깊은 용수산 봉수대를 방치하는 것은 세종시의 정체성 차원에서라도 너무 아쉽다”고 말하는 윤 읍장은 “세종시와 행복청에서 협력하여 용수산 봉수대 복원 사업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서울 남산의 봉수대가 복원되어 국내외 관광객과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보여주듯이, 용수산 봉수대도 하루 속히 복원되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재탄생하기를 기원해본다.

윤철원 전 읍장이 절개된 한 바위 앞에서 글자로 추정되는 곳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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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충청도 / 청주목 / ◎ 연기현(燕岐縣) 조>
○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1018년) 무오에 청주(淸州) 임내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임진(명종2년, 1172년) 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 뒤에 목천 감무(木川監務)로 연기를 겸임하게 하다가, 본조 태조(太祖) 정축(태조6년, 1397년) 에 다시 두 현을 갈라서 각기 감무를 두고, 태종(太宗) 갑오(태종14년, 1414년) 에 전의(全義)에 병합하여 전기(全岐)로 고쳤다가, 병신(태종16년, 1416년)에 다시 연기 현감을 두었다.
○ 원수산(元帥山)이 현의 남쪽에 있다.【충렬왕(忠烈王) 17년(1291년) 신묘에 합단(哈丹) 병사가 동계(東界)에 침입하여 철령(鐵嶺)을 넘어서 교주도(交州道)에 마구 들어오므로, 왕이 원나라에 알려 구원병을 청하니, 세조 황제(世祖皇帝)가 평장(平章) 설합간(薛閤干)을 보내어 보병(步兵)과 마병(馬兵)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도와주므로, 왕이 만호(萬戶) 인후(印侯)로 하여금 중익(中翼)을, 한희유(韓希愈)로 좌익(左翼)을, 김절(金折)로 우익(右翼)을 거느리게 하여, 원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哈丹) 적병을 맞아서 연기현의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겨서, 달아나는 적을 쫓아 공주(公州) 웅진(熊津)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30여 리에 널렸고, 부녀(婦女)와 안마(鞍馬), 보물들을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세속에서 지금도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한다.】
○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삼국사(三國史)》의 신라(新羅) 4독(瀆)에 “웅천하(熊川河)”라고 쓰고서, 중사(中祀)에 실었는데, 본조(本朝)도 그대로 따라서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11리, 남쪽으로 공주에 이르기 5리, 북쪽으로 전의에 이르기 18리이다.
○ 호수가 3백 48호요, 인구가 1천 4백 46명이다.
○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8명, 진군(鎭軍-지방의 병영과 수영에 속한 각 진에 둔 지방 군대)이 10명, 선군(船軍-해군)이 1백 56명이다.
○ 토성(土姓-그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5이니, 위(魏), 하(河), 전(全), 경(耿), 장(萇)이요, 내성(來姓-다른 고장에서 이주해 온 성)이 1이니, 왕(王)이요,【서울에서 왔다.】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 강(康)이다.
○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다. 간전(墾田)은 2천 9백 16결이요,【논이 5분의 2에 좀 모자란다.】
○ 토의(土宜-토산물)는 오곡과 조, 팥, 메밀, 뽕나무다.
○ 토공(土貢-공물로 바치는 토산물)은 대추, 옻[칠(漆-옻칠)], 잡깃잡우(雜羽-여러 가지 잡다한 날짐승), 여우가죽, 삵괭이가죽, 수달피(水獺皮)요,
○ 약재(藥材)는 인삼, 산골[자연동(自然銅-이황화철,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황화 철강)],
마름[능인(菱仁-마름과의 한해살이풀 마름열매)]이다.
○ 자기소(磁器所-사기그릇을 굽는 곳)가 1이니, 현의 북쪽 요혜방(要惠方)에 있고,【중품이다.】
○ 도기소(陶器所-오지그릇을 구어 만드는 곳)가 1이니, 요혜방에 있다.【하품이다.】
○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
○ 금사제(金沙堤)가 현의 서쪽에 있는데, 길이가 65척이다.【전지 70결을 관개(灌漑)한다.】
【영인본】 5책 628면 【태백산사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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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문>
◎ 燕歧縣: 本百濟豆仍只縣, 新羅改今名, 爲燕山郡領縣。 高麗顯宗戊午, 屬淸州任內, 明宗壬辰, 始置監務, 其後又以木州監務, 兼任燕歧。 本朝太祖丁丑, 復析二縣, 各置監務。 太宗甲午, 幷於全義, 改號全歧, 丙申, 復置燕歧縣監。 元帥山在縣南。 【忠烈王十七年辛卯, 哈丹兵入侵東界, 踰鐵嶺闌入交州道。 王聞于元朝, 請救兵, 世祖皇帝遣平章薛閤干, 領步馬一萬三千人來助。 我王以萬戶印候將中翼, 韓希愈將左翼, 金折將右翼, 偕元兵, 與哈丹賊戰于燕岐縣南正左山下, 大捷, 追奔至公州熊津伏尸三十餘里。 獲婦女鞍馬寶器, 不可勝計。 俗至今呼駐軍之地, 爲元帥山。】 大川, 熊津。 【三國史, 新羅四瀆, 書曰熊川河, 載在中祀。 本朝因之, 春秋, 香祝行祭。】 四境, 東距淸州十五里, 西距公州十一里, 南距公州五里, 北距全義十八里。 戶三百四十八, 口一千四百四十六。 軍丁, 侍衛軍八, 旗軍十, 船軍一百五十六。 土姓五, 魏、河、全、耿、萇; 來姓一, 王; 【京來】 續姓二, 金、康。 厥土肥少塉多, 墾田二千九百十六結。 【水田五分之二少】 土宜五穀, 粟、小豆、蕎麥、桑。 土貢, 棗、漆、雜羽、狐皮、狸皮、水獺皮。 藥材, 人蔘、自然銅、菱仁。 磁器所一, 在縣北要惠方。 【中品】 陶器所一, 在要惠方。 【下品】 烽火一處, 縣南龍帥山。 【東準淸州、猪城, 西準公州禿城。】金沙堤, 在縣, 西, 長六十五尺。 【灌漑田七十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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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수산에서 바라본 원수산 전경. 용수산과 원수산은 형제처럼 남북으로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옛날 봉수대가 있었던 곳에 이제 현대판 통신중계소가 자리잡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절개된 바위 면에 닳아없어진듯한 글자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어 전문가의 분석이 시급하다. 

<봉수(烽燧)란 무엇인가>

봉수란 높은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써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 통신 조직이다. 봉화의 최초 기원은 기원전 3 백년 경 알렉산더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하며, 중국에서는 서기 1세기 후한 광무제때 정비된 수(燧)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봉수관련 기록이 보이고, 15세기 조선 세종 때에 크게 정비되고 1895년 5월 9일 봉수대의 봉수군이 폐지될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하였다.

<봉수의 종류>

1 직선봉수와 간선봉수
◎ 직선봉수:기점이 해안이나 국경인 경우 위급한 상황으로 중앙에 직선으로 연결되는 기간 선로상의 봉수
◎ 간선봉수:직봉의 보조선이며 본봉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과 본진과 본 읍에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이 있다.
2. 경봉수·연변봉수·내지봉수
◎경봉수: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인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의 봉수
◎연변봉수:해륙과 변경의 제 1선에 위치한 봉수
◎내지봉수: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봉수로서 내륙지방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중앙으로 신속히 전달.

<봉수시설과 봉수군>

1. 봉수시설
연변봉수에는 거화시설인 연대(높이 9M,둘레 21M, 폭 9M)와 연조(네모 또는 원형의 아궁이. 높이 3M) 연통을 설치하고, 연대 박에는 끝이 뾰족한 말뚝을 박은 일종의 목책으로 적군과 맹수의 습격을 예방하였다.

2. 봉수군
봉수는 중앙의 경우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수령 등의 군사 책임자가 관장하였다. 수령은 오장(伍長)과 봉수군의 근무의 성실여부를 감독하고 연대책임을 졌으며 그들의 차출과 출근, 봉수대의 이상 유무를 살폈다. 오장과 봉수군은 봉수대에서 함께 기거하면 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봉수군은 주야로 후망하는 고역을 담당하고 오장은 봉수군을 통솔하고 봉수대의 이상 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봉수군은 출퇴근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그 신분은 초기에는 봉화간(烽火干)이라하여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속하였으나 봉수의 역이 갈수록 고달프고 신분이 낮아져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되었다. 봉수군의 수는 경봉수가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각 4 명씩 배치하여 2교대하고, 연변봉수는 정원 50명에 10일 교대, 내지봉수는 정원 30명에 10일 교대였다.

<봉수 방법>
봉(烽)이란 밤에 오리는 烽火를 말하며 홰(炬)에 불을 켜서 알리는 것으로 싸리나무에 관솔을 넣어 만들었다. 수(燧)란 낮에는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하는 방법인데, 섭나무를 태워 그 위에 이리똥이나 말똥을 태웠다. 봉수대에서는 炬의 수를 달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봉수는 하루 한번 씩 정해진 시간에 거화 ○ 어느 봉수대에서든 서울까지 12시간 이내에 도달 ○ 평상시 목멱산(서울 남산)에 초저녁 무렵에 도달봉수대는 정세의 완급에 따라 평상시에 1거, 적이 해상에 나타나면 2거, 적이 해안 가까이 오면 3거, 병선과 접선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면 5거를 올렸다.

<봉수 노선>
전국의 주요 간선로를 5로로 나누고 이 기간 선로를 직봉(直烽), 직봉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는 보조선을 間烽이라 하며 30리마다 설치하여 전국 369개소의 직봉과 254개소의 간봉 등 총 623개소가 있었으며, 제주에는 별도의 25개소의 직봉과 38개소의 간봉을 설치 운영하였다.

조선시대 연기현의 지도에 용수산과 원수산의 이름이 뚜렷하게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연기현조
연기현의 성산과 원수산, 용수산, 오봉산 등이   게재되어 있다.
청주목 관하에 속한 군현지도에 군사체계 연락도가 그려져 있다.
조선팔도지도에 연기현의 금사역과 용수산이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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