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떠올리는 남명 선생의 '불호령'
난세에 떠올리는 남명 선생의 '불호령'
  • 조한수
  • 승인 2014.09.10 15: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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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의 세상과 놀다]조식의 '경'(敬)과 '의'(義)로 사는 마음

   남명 선생 초상화
벌써 고국에 들어와서 다섯 번째 맞는 추석 명절을 지냈다. 지난 해 필자의 부친의 소천(所天)이후, 오랜 만에 집안의 족보를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부친께서 관리해 오신 것을 장남인 필자가 맡아서 관리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17대 손이다. 새삼 조상 어른의 역사를 살펴보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여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의 조상은 어떻게 생각하고 무어라고 말하실까? 하는 깊은 생각을 가져 보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연산군 7년 그러니까 신유년(1501년) 음력 6월 26일에 태어나 평생을 나라의 공직을 거부하고 후학들을 바르게 가르치는데에 일념하셨다. 당시 동년배로는 퇴계 이황 선생이 경상도에서 한 학파를 이루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이다. 지리적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와 영남좌도를 대표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

이익은 지리산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다.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이때가 선조 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
1571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은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하였다. 이 말처럼 조식 또한 일 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따르면 “내 비석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는 이황의 유언을 들은 조식이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처사(處士)란 아무 관직생활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낸 무명의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생 화려하게 여러 중직을 감당했던 퇴계가 죽을 때는 자신을 처사(處士)라고 하면서 가난하고 이름없는 초야의 선비라고 하니 평생 관직하고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남명선생으로서는 기가 막혀서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士禍)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敬義)를 학문의 실천지표를 삼은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에는 곽재우 같은 인물들이 조식의 제자들로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 당시 9000여명의 의병들 중에 7000여명이 모두 남명의 제자들이라는 점이 이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조식의 핵심 사상인 ‘경’과 ‘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였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학자이면서도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는데 그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 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경의(敬義)란 무엇인가? 경(敬)은 성인이 되는 수양의 방법으로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으며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의(義)는 올바른 것을 따르고 옳지 아니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1564년 64세 때 남명은 퇴계에게 두 번째 편지를 이렇게 썼다.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이야기하며 헛된 이름이나 훔쳐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퇴계가 형이상학적인 이론 즉 이기론의 해석과 그 논쟁에 관심을 보인 것과는 달리 남명은 현실개혁에 바탕을 둔 삶의 처세관에 더욱 철저하였다. 남명은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치도(治道)에 방관하지 아니하였으며 왕이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였을 때에도 이에 응하지 않는 대신 진정한 치도 백성을 위한 길을 임금께 상소하였다.

구체적으로 【국정을 수습하는 방도가 구구한 정사나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올바른 판단 하나에 달려 있으며 인재의 등용에 임금께서 신심을 보여 주어야한다】고 했다. 이는 남명학문의 실천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명은 인사(人事)를 버리고 천리(天理)만을 담론한다면 그것은 ‘입에만 있는 이치에 지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에게 돌이켜 반성하는 일이 없이 지식만을 갖는다’(구상지리(口上之理))면 이는 ‘귀밑의 배움일 뿐이라’(이저지학(耳底之學))고 비판했다.

남명은 왕권 중심의 절대왕정 치하에서 살면서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왕가에 대한 충성보다 백성에 대한 애민사상에 투철했다. 왕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먼저 백성이 있고서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고 나서야 임금이 있다는 입장에서 왕도를 논하였다. 그가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그는 이마저도 사양하면서 이 기회를 충언을 할 기회로 삼아서 작정하고 국왕을 향해 그간 가졌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남명 선생 위패가 모셔진 사당
을묘사직소(소위 단성소)에서 그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를 받아본 왕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명종이었다.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피붙이인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고, 결국 이러한 혼란기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왕과 대비를 향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겼다. 그는 국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아가 민암부에서 임금은 배이며 백성은 물이라 하여 물은 배를 띄우는 원동력이지만 때로는 물살이 배를 뒤집기도 한다고 하여 백성을 떠난 왕권은 위태한 것임을 주창하였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했다. 또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주님의 교회(세종시)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조상의 이같은 역사를 살펴보면서 필자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며 다시금 불호령을 내리시는 남명 선생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입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어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오늘 우리의 처지를 부끄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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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읍민 2014-09-11 09:18:01
목사님의 좋은글.. 이번에도 많이 배웠습니다.
남명선생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또 배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도담동 2014-09-11 08:20:57
조식 선생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네요.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