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어질 인만 실천해도”
“공자의 어질 인만 실천해도”
  • 김장수
  • 승인 2015.12.11 13:1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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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곰이 2015-12-13 16:51:16
새로이 알게 된것이 많습니다. 공자님께서 그토록 폄하되셨었다니... 시대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라한 2015-12-13 16:40:27
태극권이 운동이냐 건강이라는 논의가 저때부터 시작 됐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 사범 2015-12-12 23:14:2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 제1편 학이 중에서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세계관을 확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됨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무슨 일이든 듣는 대로 순조롭게 이해했고,

일흔 살에는
마음 가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그 쓸모를 알 수가 없다.

만일 큰 수레에
소의 멍에를 맬 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말의 멍에를 걸 데가 없으면

어떻게 그것을
끌고 갈 수 있겠느냐?

- 제2편 위정 중에서

부모를 섬길 때는

잘못하시는 점이 있더라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야 하고,

그 말을 따르지 않을
뜻을 보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부모의 뜻을 어겨서는 안 되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 제4편 리인 중에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있다.

천명을 두려워해야 하고,
위대한 성인을 두려워해야 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위대한 성인에게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 제16편 계씨 중에서





<논어>에서 발췌

정사범 2015-12-12 23:07:36
누구에게나 군자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의 측면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인을 소인으로 지목해놓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의
전형인 것처럼 비난하고 공격한다면

그것은 도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학교나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한두 번 실수한 전례를 가지고

그 사람을 무능력자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패거리에 갇혀 전체를 보지 못하다(비이부주)


날 때부터 성현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소인이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급하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면
누구라도 쉬고 싶어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소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소인을 벗어나야 할 때조차도
소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 잘 어울리지만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다(화이부동)


공자도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했지만

시대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기는커녕
냉담한 거절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간다면

어딘가에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며

따뜻한 말을 건네줄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는 괜한 허상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삶의 실상이다.

공자는 역시 고독의 샘물을
적지 않게 마셔본 듯하다.

- 고상함의 길은 외롭지 않다(덕불고)

공자의 말을 다시 보라.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배울 것을 찾는다.

모든 곳이
자신을 일깨우는 교육 현장이자
자신을 가다듬는 도량이다.

- 좋은 곳을 골라 따라가라(택선종지)

자하가 들려주었다.

“비록 자잘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멀고 큰 꿈을 이루는 데
진흙처럼 발목을 잡을까봐 염려한다.

이 때문에 자율적 인간은
자잘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 먼 길 가려다가 진창길 만날까봐(치원공니)


사람과의 인연이 모두 끝나서
세상에서 버림받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제 ‘나’는 세상과의 창을
하나씩 하나씩 닫아버린다.

그러다가 내가 더 이상 외로울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외로울 때가 되면,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내가 땅을 딛고
서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을 느끼게 된다.

이 세상에는 결국
나와 관계없는 ‘남’이 없는 것이다.

- 세상 사람이 모두 나의 형제자매다(사해형제)


공자 제자들도 모두 처음에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공자 문하에 들어섰지만

시간이 지나자 두 부류,
즉 중도이폐와 욕파불능으로 나뉘었다.

안연의 말에 따르면

학생은 선생이 따라가고자 노력해서
원래 있던 간격을 메우고자 하지만

학생이 다가가면
선생은 어느 틈에 저만치 멀리 가 있다.

이처럼 줄어들지 않는 차이를 보고서

어떤 이는 더 이상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지쳐 주저앉게 되는 반면

어떤 이는 자신이 도달한 지평을 점검하고
다시 신발 끈 조여매고 앞으로 나아간다.

-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네(욕파불능)

자로가 자율적 인간에 대해 물었다.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맡은 바를 신중하고 차분하게 수행한다.”

자로가 너무 간단한 대답이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해줘야지.”

자로가 다시 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줘야지.

자신을 갈고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네.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그러한 목표에 대해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지.”

- 자신을 갈고닦아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수기안인)


이제 제주도 유채꽃밭을 보라.
멀리서 보면 세상이
온통 노란 물감으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유채꽃 나무에는
꽃을 피우지 못한 가지도 많다.

그리고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도 많다.
그들은 함께 결실의 시간을 달려온 녀석들이다.

마지막 순간에만 집중하지 마라.
그 앞의 시간도, 꽃을 피우지 못한 놈도
열매를 맺지 못한 놈도 우주의 한 식구다.

- 싹을 틔워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묘이불수)



번지가 평화와 화해에 대해 물었다.
공 선생이 대꾸했다.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지.”

- 예의를 만나 성숙한 주체로 거듭나다(극기복례)

-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 인생의 굽이길에서 공자를 만나다 중에서

정 사범 2015-12-12 22:53:51
공자(孔子)는 춘추시대 말기인 B.C.551년, 현재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방인 노(魯)나라의 작은 마을인 추읍( 邑)에서 태어났다. 이 때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태어난지 10여년 뒤이고,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시기에 해당한다. 공자는 은(殷)나라 왕족의 몰락한 후예의 집안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아버지는 급무사였던 숙량흘(叔梁紇)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안징재(顔徵在)였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이구산(尼丘山)에 남몰래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고 공자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불우하였고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장례식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였던 모양이다. 당시 공자의 집안은 몰락하여 겨우 벼슬을 할 수 있는 계급인 사(士)에 속해 있었다. 사계급은 위로는 귀족과 대부, 아래로는 서민의 중간에 있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공자 나이 24살 되던 기원전 528년에 공자의 어머니는 4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방(防) 땅에 아버지와 합장하여 묻고 삼년상을 지낸 뒤 또 2, 3년 지나서야 다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은 예(禮)와 덕(德)과 문(文)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공자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주(周)나라를 동경하였고, 그 반대로 당시의 권세 있는 대부(大夫)들이 제후(諸侯)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농단하던 사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게 된 공자가 정치에 관여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공자가 살던 당시 춘추시대에는 국가간이나 나라안이나 간에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여 온갖 명목의 전쟁과 난리가 연이어 일어나 민중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仁)의 실천, 곧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했던 공자로서는 그러한 현실을 목도하고서도 책이나 읽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가들에게 자기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설파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도 하였고, 직접 벼슬을 맡아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도덕정치철학은 시대를 넘어 후대에 계승되어 한(漢)나라에서 국정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동양의 역사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교육자와 뛰어난 정치철학자로서의 일생을 보낸 공자도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들 리(鯉)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顔淵)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으며, 여러 나라를 떠도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고 테러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노년에는 이런 모든 것을 잊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 『춘추(春秋)』같은 책을 엮고 『역경(易經)』에 재미를 붙여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하는 한편, 고향의 이상이 큰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479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가장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사상의 중심을 인(仁)에 두었다. 최고의 덕을 인으로 본 공자는,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의 대표작품인 『논어』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공자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이다.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공자의 혼잣말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제자의 물음에 공자가 대답한 것, 제자들끼리 나눈 이야기, 당대의 정치가들이나 평범한 마을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책의 제목이 『논어』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