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이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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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호
  • 승인 2014.04.2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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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 길라잡이]역사 서적의 바이블사마천의 '사기'

사마천, 그는 '사기'를 저술하고 궁형에 처한 역사의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꼭 읽고 싶은 책이나 너무 양이 많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사마천 평전이 손에 잡혔다. 이 책 사마천 평전은 오랫동안 《사기》를 연구한 중국의 역사학자 지전화이(季鎭淮)가《사기》연구로는 1955년에 처음으로 낸 책으로, 중국에서는 아직도 학계의 주목뿐만 아니라 독자의 사랑을 받는 책이다.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으로 기원전 134년 한나라 경제(景帝) 때 지금의 산시성 황하 강기슭 용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죽음과 관련 되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얼마나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 무제의 일생과 비슷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사마천의 가계는 (周)나라 이래로 오랫동안 대대로 사관인 가문이다. 사마천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 사마담이다. 그는 한나라 태사령(太史令)으로 사관이었다. 원래 사관이란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이었다. 그리고 사관이란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에는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었고, 다만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운 비천한 직위였다.

한나라 초기의 통치사상은 황로사상(黃老思想)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인 황제(黃帝)와 도가(道家)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를 신봉하는 사상이다. 사마담(司馬談)도 이 사상을 배웠다. 그러나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강화된 무제(武帝)부터 무위(無爲)의 정치가 끝나고 인의(仁義)로 포장된 다욕의 정치로 가면서 당시 지배층은 황로사상을 유가사상으로 대치했다.

사마담는 생각과 논리가 치밀했다. 그는 과학적인 사고와 역사적인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다. 현존하는 사마담의 유일한 논문 논육가요지 (論六家要旨) 를 보면 유가(儒家)사상에 대하여 긍정과 비평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도가에 대하여는 긍정적이었다. 이는 그가 배운 황로사상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유가는 몹시 광범위하여 요점 잡기가 어렵고 수고로운데 효과는 적다고 말하고, 묵가(墨家)는 검소를 내세우나 전부 따르기가 어렵고, 법가(法家)는 엄격하고 은혜가 적지만 군신 상하간의 본분을 바로 잡는다고 평하였다.

이에 반하여 도가는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는 것도 없다며, 사실 그 주장은 쉽게 행할 수 있지만 그 말뜻은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도가는 허무를 근본으로 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평하였다.

사마담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일 즉 봉선(封禪)을 주관했다. 한 무제는 동쪽으로 순시하고,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했는데 당시 낙양에 머물러있어 황제를 수행하지 못하여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이 화병이 되어 죽었다. 그는 하층계급에 해당되는 사관의 신분이나 평범한 관료는 아니었다. 그는 몸소 황제가 주관한 행사에 참여 하거나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등 숭고한 이상을 가진 자였다. 그의 이상과 계획은 아들 사마천에게 고스라니 전해졌다.

사마천의 역사여행
사마천은 어린 시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았다. 그래서 백성들의 민생고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스무 살 즈음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전국 명산대천을 여행하며 백성들을 접촉했고 고대와 근대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이때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체험하면서 얻은 경험이, 훗날 《사기》 저술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순임금과 요임금의 흔적, 비극적인 시인 굴원(屈原)이 목숨을 던진 곳, 명장 한신(韓信) 일화의 현장, 공자가 머물렀던 곳, 항우의 도성 등을 답사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포부를 키웠다. 2100년 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부친 사마담의 녹봉이 변변치 않은데, 아들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여 여행하게 한 것은 사마담의 뜨거운 직업의식이라 본다.

엄혹한 현실에서의 공부
사마천은 당시 엄혹한 현실 아래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관리나 백성이 글을 올릴 때 글자 한자라도 정확하지 않으면 문책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이 책 《사마천 평전》에 당시를 상상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한 무제 때 석건(石建)이 낭중 령으로 있을 때 어떤 일에 대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상소문이 결재를 거쳐 내려왔다. 석건이 그 글을 읽고 무척 두려워했다.

“잘못 썼구나! 마(馬)자는 아래에 꼬리를 나타낸 획까지 총 5획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보니 4획만 있고 한 획이 모자라는구나. 주상께서 잘못을 물으신다면 죽을 죄에 해당된다.” (P50)

이처럼 당시에는 글자 한 자를 잘못 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결과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문자를 중요시하는 관료제도와 사마담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사마천은 분명 매우 어려서부터 글자를 배웠을 것이다. 9000자를 익히고‘팔체’의 글씨체를 배우는 게 어린 학동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지만 당시 벼슬길로 나아가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요구 사항이었다.

아버지의 유언
사마담은 그의 필생의 사업과 이상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사마천이 대를 이어 태사가 되기를 바랐고, 태사가 되고 나서 그가 논하여 기록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사마담은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마지막 목적은 자신을 세우고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사마담은 공자사후 제후들은 서로 정복하려고 싸우기나 하고 사관의 기록이 끊어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제 천하가 통일되고 현명한 군주, 충성스런 신하, 정의위해 목숨 바치는 선비들이 있어 기록되어야 함에도 기록되지 않고, 천하의 역사 문헌들이 폐기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꼭 받들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실 중국인은 현실 이외에 또 다른 하늘의 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위대한 인격이나 공훈 혹은 저술을 남겨 후세에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 곧 영생이었다. 사마담이 선택한 영생의 길은 저술이다.

이릉(李陵)의 화(禍)와 궁형
사마천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이미 낭중벼슬을 하고 있었다. 낭중은 황제의 시중이다. 아버지가 죽은 3년 후에는 아버지가 바라던 태사령이 되었다. 한나라가 이제 건국된 지 100년이나 되었고, 제도개혁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태평성세 분위기이며 동시에 봉건계급의 압박과 착취, 계급간의 갈등과 대립은 날로 심해진 때인 지금, 사마천은〈춘추〉와 같은 책을 저술해야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런데 원고를 집필한지 6년, 아직 초고도 완성하지 못한 그에게 일생일대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이릉(李陵)의 화다. 그 당시 이릉은 최고의 명장이었다. 불과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흉노 3만의 기병(騎兵)을 상대하여 싸웠다. 이릉의 군대는 몇 차례 승전하여 3000명 내지 40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엄청난 수적 열세로 흉노에 져서 투항하고 말았다. 이릉이 적에게 가한 눈부신 전과는 그 당시 한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이릉이 항복한 일에 격분하였다.

무제는 사마천을 불러 이릉사건에 대하여 견해를 물었다. 사마천은 당시 신하들이 무제에게 보고한 것과는 달리 이릉이 평소 품성이 훌륭하고 전과에 비하여 그에 대한 비판이 지나 치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생각과 다르게 이릉의 공적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그는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가 사마천의 나이 48세, 사기를 저술한 지 7년 째 되는 해였다.

당시 법률에는 사형을 언도받고 죽음을 면하려면 50만전이라는 막대한 벌금을 내거나 남자의 성기를 거세하는 일명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다. 사마천은 먼저 죽고 사는 문제를 생각하기 보다는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했다. 용기 있는 자라 해서 반드시 절개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고, 겁쟁이라도 의를 사모하면 어떤 행동도 힘써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은 평생의 저술이 완성되지 않고 중단될 위기에 처할 것을 생각하고 궁형을 자처하여 사형을 면했다.

궁형은 사마천의 육체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 중요한 인물도 불행을 겪고 난 후에 저술에 분발하여 세상과 후세에 정의롭지 못함을 호소했던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한 치욕이라도 견뎌 내고 그의 이상인 저술을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인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이릉사건의 전말과 함께 비통한 마음을 적었다.

사마천은 42세 때부터 사기편찬에 들어가 56세까지 14년간에 걸쳐《사기》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궁형을 받기 전과 후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처음에는 한 무제와 한나라 왕실 자체를 찬양하는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했지만, 궁형을 받은 후로는 문제를 파악하는 관점, 인물과 사건에 대한 통찰력, 사상적인 넓이와 깊이 등이 변화했다. 특히 한나라 왕실과 한 무제에 대한 비판의식, 사회의 곪아터진 부분과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제2의 춘추의 꿈
사마천은 한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를 배웠다. 공자는 시운(時運)이 좋지 않고 명군(名君)을 만나지 못했기에 만년에 노나라 242년 동안의 역사기록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가려 천하의 좌표로 삼고자〈춘추〉를 지었다. 동중서의 춘추 학설은 사마천이《사기》를 저술할 때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사마천의 이상은 《사기》를 제2의 공자가 되어 제2의〈춘추〉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실제 봉건통치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천도(天道), 왕도(王道), 인도(人道) 등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춘 완벽한 책이었다. 사마천도 객관적 역사사실을 통해 천도관, 역사관, 도덕관 등이 포함된 봉건사회의 정치적 도덕이 되는 사상체계를 저술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실록 속에 자신의 창작 이상을 적절히 선택하고 포함시켰다.

인물중심의 역사
사마천은 인물 중심의 역사를 썼다.《사기》의 주요 부분은 제왕의 정치적 업적내용인 12본기(本紀), 작은 제후들의 활동상인 30세가(世家), 귀족, 공자, 작은 관료, 정치가, 사상가, 의사, 점쟁이, 상인, 배우 등 다양한 유형의 역사인 70열전(列傳)이다. 이것이 책 전체의 중심이다. 그의 역사 서술 방법은 이렇게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전체(紀傳體)다.

이것은 사마천이 역사학에서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지만 여기에는 또, 역사적인 현실적인 배경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래로 사회는 급변했고, 계급투쟁이 복잡하고 격렬하게 전개됐다. 각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계급과 계층, 특히 그중에서‘사(士)’가 사회에서 크게 활약했다. 일시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나 다양한 사상적 담론이 논의되었고, 정치와 사상 방면에서 투쟁을 전개하면서 개인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사마천은 이 인물들의 활동역사를 서술하였다. 사마천은 각양각색의 인물은 사회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존재일 뿐 아니라, 사회변화와 역사적 사실을 일으키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역사발전론
사마천은 역사가 영구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진나라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기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사관은 전국시대의 추연(騶衍)의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였다. 이설은 역사발전이 토목금화수(土木金火水)의 오행의 순서로 된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오덕종시설을 자신의 통치 명분으로 내세웠다. 진시황은 진나라가 오덕종시설 중 제일 마지막인 수(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수극화(水剋火)‘물은 불을 이긴다.’의 논리를 내세워 화덕(火德)인 주나라를 멸한 진(秦)나라가 수덕(水德)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의 진(秦) 왕조가 그때까지의 왕조 중에서 영원한 마지막 왕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사마천은 객관적인 실제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객체의 변화발전을 인정하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역사순환론의 공식을 파괴했다.

민중성의 사상
사마천은 역사인물에 대하여 평면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하고 애증을 담았다. 예를 들어 유협열전(遊俠列傳)서론에서 ‘학술로써 재상이나 경대부의 지위를 얻고, 당시의 군주를 보좌하여 공명이 역사에 기록된 사람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반면 ‘유협(遊俠)에 속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봉건통치계급이 말하는 정의에는 들어맞지 않을지라도 사실 그들은 인의를 매우 중시하며 매우 도덕적이다‘ 고 칭송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사회규범 적으로는 벗어난 행동을 하나 그들은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고 행동은 늘 과감하며, 일단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 말며, 나아가 신명을 바쳐 사람의 위난을 구하려 하고, 무슨 일이든 목숨을 바쳐 일을 하며, 그 능력을 자랑하거나 타인에게 신세 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래서 그는 항우, 진섭, 이광, 신릉군, 형가, 곽해는 칭송했으며 전분, 공손홍, 장탕은 증오하였다. 그는 봉건통치계급의 이른바 성현과 인의도덕을 의심했으며, 민중의 이익과 희망이 억압받는 것에서 도덕의 문제를 보았다. 그래서 필부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 포악한 통치자에게 죽을 각오로 저항하는 데 높은 도덕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유일한 역사전기문학
기전체는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있을 수 있으나 역사와 문학이 결합된 소위 역사전기문학(歷史傳記文學)이 된 것은 사기가 유일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고대의 역사와 인물들이 선명하게 살아 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유창한 통속적이고 사실적 언어로 번역하였다. 예를 들어 장승상열전(張丞相 列傳)에서는 주창(周昌)이 말 더듬는 것을 그렸는데 “신은 그, 그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로 묘사하였고,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는 진섭의 옛 동료가 사투리 쓴 것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워매, 대단하네! 진섭이 왕이 되더니 궁전이 크고 높구먼!”

사마천이 언어를 운용하는 또 다른 노력은 가요, 항간(巷間)에 떠돌며 쓰이는 속된 말, 속담 등을 채용하여 사건을 서술하거나 사람의 업적(業績)을 논(論)하고 칭찬(稱讚)하는데 표현함으로써, 언어를 풍부하게 하고 문장의 감동력과 설득력을 강화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서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라든가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천금을 가진 부자는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영행열전(佞幸列傳)에서“힘써 농사짓는 것은 풍년을 만난 것만 못하고, 옳게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것만 못하다.”라는 표현이 그 것들이다.

반고 《한서(漢書)》의 사마천 《사기》에 대한 평가
반고(班固 AD32~92)는 사마천(기원전145~ ?)과 다른 시기의 사람이다. 사마천보다 반고는 100여년이 지난 후한(後漢) 사람이다. 당시는 한의 중흥기로 사회질서와 발전을 어떻게 유지하는 가에 있었다. 따라서 반고시대에는 동중서의 유교사상이 국가의 제도와 활동의 중심사상이 되어있었다. 반고의 사관의 중심도 그랬다. 이에 반하여 사마천의 《사기》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을 앞세우고 육경(六經)을 뒤로 했다. 반고의 《한서》는 유교의 질서신분관계에 집중하고, 이 유교적 질서관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마천의 《사기》의 화식(貨殖,경제행위)열전에서는 세력과 이익을 숭상하고 빈천함을 수치로 여겼다. 그만큼 사마천은 경제행위에 대하여 반고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가장 먼저 돋보이는 차이는 인물의 평가와 사서(史書)내의 배치에서 드러난다. 사마천은 인물의 영향력으로 선비가 아닌 간웅(奸雄)일지라도 신분의 제한을 넘어 평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사기》에서 항우와 여태후(呂太后)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천하를 호령하였음으로 항우가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적이었지만 황제들의 기록을 담은 본기(本紀)에 포함시켰다.《사기》의 자객열전(刺客列傳)은 군주를 살해하는 역적을 논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유교적인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놀라운 일이다.

《사기》에서 공자와 진섭(陳涉)은 제후의 자격이 없었지만, 공자는 학술적 혹은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진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신분제의 논리구조에 커다란 화두를 꺼내들고 민중봉기를 이끌어, 중국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하여 제후의 기록인 세가(世家)에 기록하였다.

또한 열전에서 당시의 코미디언을 기록한 골계열전(滑稽列傳), 동성연애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택일이나 금기 등에 관한 이들을 기록한 일자열전(日者列傳), 점쟁이들을 기록한 구책열전(龜策列傳) 등 다양한 주제로 사회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반고의《한서》는 기행과 해학의 기록인 동박삭전(東方朔傳)이 기록되어 있지만, 사마천의《사기》만큼 다양하게 사회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사마천의《사기》는 단순한 왕조의 유지를 위한 역사서가 아닌, 자신만의 역사관을 위한 역사서이다.

21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사마천의《사기》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나라 문학가 모곤(茅坤 1512~1601)이《사기》를 평했다. 사람들이《사기》의 유협열전을 읽으면 곧 죽음을 가볍게 여기려고 하고,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을 읽으면 곧 눈물이 쏟아지려 하고, 장자열전(莊子列傳)과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을 읽으면 곧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려 하고,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읽으면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서려 하고, 만석군열전(萬石君列傳)을 읽으면 허리가 절로 숙여지려 하고,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과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을 읽으면 곧 식객을 양성하려고 한다고 한다. 바로《사기》의 매력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움직여 뜻을 세우게 하는데 있지 않을까? 사마천평전을 사기열전을 읽기 전에 일독을 권한다. 사마천의 생각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동중서에게 [춘추]를 배웠다
한 무제는 일찍이 격오格五(바둑놀이의 일종)에 능한 어린 오구수왕吾丘壽王으로 하여금 동중서에게 [춘추]를 배우게 했다. 이때 젊은 사마천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동중서에게 [춘추]를 배웠다. 이것은 아마도 한 무제 원광과 원삭 사이의 일로 여겨진다. 대략 이 시기에 공안국孔安國이 박사가 되었고 사마천은 또 공안국에게 [고문상서]를 배웠다. 동중서의 [춘추] 학설과 공안국의 [상서] 학설은 젊은 사마천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중서의 [춘추] 학설은 사마천이 나중에 [사기]를 저술할 때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협객의 행동이란 말하자면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킨다. 그리고 행동은 늘 과감하고, 일단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 만다. 나아가 신명을 바쳐 사람의 위난을 구하려 하고, 무슨 일이든 목숨을 바쳐 일을 하며, 그 능력을 자랑하거나 타인에게 신세 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협객의 무리들은 일개 서민이면서도 은혜는 반드시 갚고 맡은 것은 반드시 해낸다. 가령 1000리에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굳게 의를 지켜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눈치 등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삼국지연의 중에 관우 장비 두 사람은 거병한 이래 일관하여 유비를 위해 헌신한 것은 이런 행동원리에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의장'(義將) 이라 칭하며 사마천의 <유협열전> 에서 말하고 있다.) 역사 진의의 고증은 육예가 기준이다. 이것은 역사 저작에 있어 필수적이다. 이것은 공자를 통해서 전해진 유가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사마천은 허유가 육예와 유가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유의 전기를 짓지 않았다. 사기는 실록이다. 반고의 해석에 따르면 거짓으로 미화하지 않고 악한 것을 감추지 않는 것,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다. 봉건통치자의 편견에 구애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의복잡한 상황을 반영함으로 진실 된 역사를 일깨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조 유방에 관련된 신비롭고 기이한 사건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졸렬하고 추악한 사건도 많이 기록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는 서적을 지었다고 비난하는 원인이 바로 이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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