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철교 가설 전 금강은 어떻게 건넜는가?
금강철교 가설 전 금강은 어떻게 건넜는가?
  • 송두범
  • 승인 2024.04.0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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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 금강 배다리와 금강철교... 이순신, 하멜, 인조 모두 금강나루 이용
제 2 금강교 조감도 

공주에는 금강 상류부터 청벽대교(2000년), 신공주대교(2000년), 공주대교(1986년) 금강교(1933년), 백제큰다리(2001년), 공주보상부교량(2012년), 웅진대교(2002년) 등 7개의 교량이 가설되어 있다.

공주 금강에 있는 교량중 금강철교와 공주대교를 제외한 교량은 모두 2000년 이후 건설된 교량이다. 이 중 금강철교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어 현재까지 사용 중인 유일한 교량이다. 금강에 교량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금강의 나루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넜을 것이다. 공주 금강에는 고마나루와 금강나루, 장깃대나루가 대표적이다.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하던 현종,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란 온 인조, 1377년 나주 유배지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상경하는 정도전, 백의종군을 위해 남도로 내려가는 이순신 장군,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네덜란드 표류선원 하멜일행 등은 모두 공주 금강의 나루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넜을 것이다.

금강이 결빙하여 배가 다닐 수 없는 동절기에는 ‘흙다리’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얼음 위에 진흙을 뿌려 만든 다리로 이듬해 봄이 되면 철거되었다.

경부선 개통 이후 철도교통에서의 소외를 만회할 돌파구 마련이 시급했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신작로 개통을 통한 도로교통의 확충과 자동차의 운행이었다. 신작로 개통은 구한말부터 계속된 일이었지만 금강으로 인해 단절된 도로를 연결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금강의 배다리

이러한 시기에 공주 갑부 김갑순(1872~1961년)이 재원을 투자하여 금강에 배다리를 건설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공주사람들이 금강을 건너는 가장 큰 길은 장깃대나루였고, 1910년 당시 수심도 2.5m로 얕아 가장 적정한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7년 정미칠조약 이후 공산성의 중군영(中軍營)이 일제시기 폐지되었고, 일제강점 초기 김갑순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성안마을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김갑순은 이곳에 쌀 창고와 가옥을 짓고 쌀을 쉽게 이동하기 위해 지금의 공산성 금서루 자리의 언덕을 낮추어 서문고개를 내기도 했다.

결국 배다리(구 금강교)를 금강나루에 설치한 한 것은 김갑순이 자신이 개발한 공산성 성안마을과 중동(신시가지) 일대를 활용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금강나루와 성안마을 앞으로는 김갑순이 운영하는 별도의 포구시장인 ‘새장터’도 개설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공주 배다리(구 금강교)에 관한 기록 중 최초의 기록은 베버 신부가 공주를 방문한 1911년 4월로, 그의 회상록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년)’중 견고한 다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골짜기 위에 걸려 있었다는 대목으로 보아 그 이전에 목교(木橋)형태의 배다리가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금강의 목교
금강의 목교

구 금강교 건설 직후 김갑순은 공주를 중심으로 조치원, 예산, 논산, 부여 등지를 오가는 승합차 운영권을 매입하였다. 결국 배다리(구 금강교) 가설은 차후 공주 중심으로 지역간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이를 이용한 승합차 운영권에 대한 투자가 많은 이재를 남길 것이라는 점을 빠르게 포착한 김갑순의 사업수완 결과로 볼 수 있다.

배다리의 가설로 충남도청소재지이며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공주는 방사형 도로망을 구축하고 주변 지역과 긴밀하게 얽힘으로 지방유통권의 중심을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대전을 비롯하여 조치원, 논산, 강경 등 철도역 중심의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천안~온양 간 철도 개통으로 천안, 예산, 광천 등 서해안지구 상권이 형성됨으로써 1920년 이후 공주는 충남 일주 순환철도의 장벽에 둘러싸인 채 격차는 점점 커갔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금강철교<br>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금강철교

공주 배다리도 홍수기 마다 파손되거나 유실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공주 배다리의 형태가 목교에서 배다리의 형태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홍수 등이 빈발하자 1922년 이후 공주 목교형태의 배다리는 배를 이용한 배다리를 가설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금강의 범람으로 매번 유실되었고 이때 마다 철거나 수리·정비를 계속해 왔다.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에 따른 보상책으로 조선총독부가 1933년 11월 25일 금강철교를 완공하자 배다리는 비로소 그 역할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아마 20여 년 정도 배다리를 이용한 것을 보인다.

1937년 산성시장이 개설되면서 금강철교는 공주의 관문역할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고, 시가지가 금강 연안으로 점차 이동이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도 금강철교 개통의 결과였다.

금강철교는 한국전쟁시기 인민군의 공주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1950년 7월 12일 오후 11시에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1956년 9월에 복구하였다.

금강철교는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강북에서 강남방향으로 차량이 일방통행하며, 강 상류쪽 일부는 자전거 및 사람이 통행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

2023년 8월 30일 금강교 개통 이후 91년 만에 공주시 금성동과 신관동을 연결하는 제2금강교를 현 금강교 하류 7m 거리에 총연장 820m, 폭 9.9m 왕복 2차로 교량으로 건설하는 착공식을 가졌다.

2026년 제2금강교가 완공되면 현 금강교는 보행교로 전환하여 다양한 이벤트 개최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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