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하는 편 택한 작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안하는 편 택한 작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 김충일
  • 승인 2024.03.18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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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 허만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하지 않을 자유' 침묵으로 표현
‘싶은’이라는 세계, "그곳에는 ‘싶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 존재하지 않아"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 ( 허만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중에서 )

‘벌써’라는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2월은 달력 속에 접혀 들어갔고, 은근히 다림질한 햇살은 온기를 품은 채 벚나무 젖빛 눈망울을 띠우면서 ‘이미’ 3월로 다가와 있다. 새 학기를 맞아 만난 학동들에게 묻는 것처럼 나에게 묻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마음먹었던 일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냐고. 그 설계는 ‘이미’ 외면하고픈 자신과의 약속이 되어 깨져버린 것을 눈치 채고 있지만, 뭔가를 선택해 이루어보겠다며 반복해 온 다짐이 멋쩍게 느껴진다.

이런 때 『모비딕』으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1853년에 발표된 단편 소설 『필경사(筆耕士)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 속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라는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문제적 목소리를 들어보자.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자유의지의 단호한 표명이 심상치가 않다. ‘~해야 한다’는 강박의 말을 입에 달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하지 않을 자유’를 침묵으로 표시한 최소한의 수동적 저항자 바틀비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바틀비를 고용한 적이 있는 변호사(話者)의 회고로 시작한다. 자본주의의 중심지인 미국 월 스트리트의 한 법률 사무소. ‘바틀비’라는 인물이 필기 노동자인 필경사로 고용된다. 마치 필사에 굶주린 듯, 기계처럼 많은 양의 필사를 소화하는 바틀비의 근면 성실한 모습은 변호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필사한 문서를 검토하라는 변호사의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그는 그 말만을 반복하며 점점 아무것도 안하는 편을 선택한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호사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며 월스트리트의 벽만을 바라본다. 그런 바틀비의 태도엔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다가 결국 부랑자로 유치장에 수감되지만, 식사마저 거부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죽은 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그 배달 불능 우편물들 속에서 무수히 많은 안타까운 사연과 죽음, 절망을 보았을 바틀비를 향한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변호사의 탄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 구절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을 거절하는 방식, 비일상적인 거절의 문법에서 연유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I would not prefer to)가 아니라 바틀비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 한마디로 그는 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일 안 하는 것을 ‘긍정’했던 것이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시에 맞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는 절묘한 표현이다. 화자인 고용주 변호사는 바틀비가 왜 이런 기이한 언행을 하는지 이해하려 하나, 끝내 그 이유를 찾지 못한다.

‘창백할 정도로 말끔하고 가련할 정도로 점잖고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한’ 바틀비가 작품 속에서 내뱉는 대답은 이런 것이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바틀비로 인해 법률사무소에는 이전에 없던 세계 하나가 생긴다.

‘싶은’이라는 세계다. 일찍이 그곳에는 ‘싶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 존재하는 법률 문서를 똑같이 베끼는 필경사의 일처럼 ‘이미 있는 것만이 그 있음을 증명’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바틀비의 말없음 속의 외침은 소설 속에 그대로 무의미 하게 잠수하고 말 것인가?

한 번도 자기 삶을 의심해보지 않았던 변호사(고용주)와 관행과 상식에 입각한 질서에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바틀비(피고용인).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고용-피고용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만들어진 법과 윤리, 관행에 따른 당연한 책무와 요청들로부터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가 그 관계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현실에는 그 모든 관계를 거부한 바틀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렇게 소멸해가는 바틀비와 그것을 지켜보는 변호사,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것이다. 그것은 삶의 메인 스트림을 거스르며 비켜난 사잇길에서 생의 이면을 환기시키며 이렇게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한다.

고용주는 바틀비를 섣불리 해고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러나 결코 변화를 시도 하지 않을 바틀비, 어쩜 그는 죽음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아닐런지. 그것도 세상과 타협하거나 더불어 사는 것 또한 ‘선호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고립과 고독을 감수하면서 까지 바틀비가 지켜내야 할 자존감은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내 말을 반대로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닐까? 고용주인 변호사는 “그 필경사가 선천적인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장애의 희생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육신에 물질적인 원조를 줄 수 있겠지만,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육신이 아니었다. 고통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이었으며 나는 그의 영혼에 닿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바틀비는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 쓸모없는’ 존재들을 떠 올리게 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왜 그렇게까지 모든 걸 거부하면서도 쓸모없다고 평가되는 삶을 살아야 했을까? 아마도 수취인 불명 우편물을 처리하며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바틀비가 태워버리기 전에 읽은 받는 이를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수없이 담겨 있다.

‘당신을 구제 해 주겠소’, ‘당신을 용서 하겠소’…, 생명에 관한 사명을 짊어진, 누군가를 향한 뜨거움을 간직한 우편물들을 받아줄 상대방이 없다는 걸 계속 확인해야 했던 바틀비. 필경사인 그는 받는 이를 잃어버린 우편물을 태우고 남의 문장을 계속 베끼면서 소통을 거부하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존재의미를 되묻다가 결국 효용성으로 평가되는 이 사회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소통이 부재하는 우편물을 계속 보면서 절망감에 빠지는 바틀비. 내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좌절감, 상대방이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보내오는 메시지들로 인한 괴로움…. 그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숨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지금을 그저 인정해 주는 메시지, 때로는 누군가를 마음을 다해 기다려주겠다는 메시지, 또 때로는 나에게 당신이 정말 필요하다는 메시지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배달의 수취인을 잃어버린 우편물이 ‘죽은 편지들’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복사기에 의해 대체된 서류 베껴 쓰기는 인간적인 노동이 아니라 기계적인 노동이고 ‘죽은 노동’이다. 주도면밀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더 심각한 비인간화와 인간 통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쟁에 쫓기며 일을 할수록 점점 커져가는 혐오와 갈등, 소통부재의 폭력 속에서 소외된 편지들은 아마 또 다른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법률 문서로 대변되는 딱딱한 기록만을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곧 소각될, 수취인의 흔적이 지워진 언어들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바틀비를 원하지 않는다. 순응하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기를 바란다. 현상이 본질을 억압하는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인해 ‘죽은 편지’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선호하지 않습니다.’ 아님 ‘선호합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현대사회에서 노동과정에서 소진과 절망을 체험한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힘을 얻는다. 그는 불합리한 일들을 하루하루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를 꿰뚫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면서...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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