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복명복창'하고 '각답실지'해야...
일은 '복명복창'하고 '각답실지'해야...
  • 김정환
  • 승인 2024.02.1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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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정환 한국영상대 교수, 한국전쟁 금강전투에서 얻는 교훈
전국시대 통일 기반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후다닥 거리지 마라"

모든 업무의 시행착오 방지는 ‘복명복창(復命復唱)에 각답실지(脚踏實地)’의 실천으로...

김정환 한국영상대 경찰행정과 교수
김정환 한국영상대 경찰행정과 교수

'복명복창 각답실지'(復命復唱 脚踏實地)

‘복명복창’이란 상급자가 내린 명령이나 지시를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 명령과 지시가 정확하게 전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각답실지’란 다리로 실제 땅을 밟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발로 뛰며 현장을 확인하는 성실한 자세를 이르는 말입니다.

복명복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은 군대이며 그 중에서도 포병, 탄약병 등 각종 사고가 다발하는 사격훈련장 등 극히 위험한 곳이고 이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일, 이, 삼, 사’가 아닌 ‘하나, 둘, 삼, 넷’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명복창은 이렇게 꼭 위험한 환경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며 음식점이나 카페 등 영업장에서 직원이 주문 사항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확인하는 것도 넓은 범위의 복명복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시, 제 고향인 세종시 반곡동 앞 금강 방어선 전투에서 복명복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제 나름의 추측하에 20분이라는 시간이 허비되어 결국 전투에서 큰 실패를 겪은 사례를 소개합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자료에 보면 ‘공주·대평리 전투’ 또는 ‘금강 방어선 전투(Battle of the Kum River)’는 1950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미군 ‘딘 소장’이 지휘하는 제24보병사단과 국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와 북한군 제3사단 및 제4사단, 제105전차사단이 세종의 3산 2수 중 원수산을 제외한 전월산과 괴화산, 그리고 금강과 미호강 사이 금강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이 전투는 7월 12일에 금강을 건너 그 남안으로 철수하게 된 제24보병사단 소속 메로이 대령이 이끄는 제19연대가 금남면 발산리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대비하는 과정에서 7월 15일 북한군의 금강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새벽 03:00부터 금강 상공에 북한의 YAK기 1대가 나타나 조명탄을 투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착은 당시 11포병대대의 155㎜ 곡사포 1문이 제1대대장의 지휘하에 조명 지원만을 전담하였는데 대대가 이 포의 조명 지역에 약간의 수정을 요구한 바, 보통 1∼2분이면 조치가 가능한 이 요구를 차분하게 재확인하지 않고 과대하게 잘못 이해한 결과 포의 가신을 이동하면서 방위각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급한 성격인 병사의 실수였는지, 아니면 포성으로 인해 명령이 잘못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이러한 큰 실수로 인해 20여 분이나 조명 지원이 중단되고 금강 지역이 칠흑의 어둠에 덮이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탄 북한군은 작은 배나 뗏목 등 불충분한 장비로 도하에 성공하여 04:00경 괴화산 동북쪽 3.5㎞ 부근 합강리에서 강을 건너 우회하여 괴화산 정상에 본부를 두고 북쪽 강변을 향하여 3개 소대를 배치한 Henry 중위가 이끄는 C중대와 다른 L중대를 공격하여 중대원 171명 중 122명이 전사하고 이로 인해 전략상 중요한 장애물을 이루고 있는 금강 방어에 실패하면서 결국 대전이 뚫리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금강방어를 위해 결사항전을 벌였던 개미고개 전투 희생자를 추모하는 개미고개 추모탑
금강 방어를 위해 결사항전을 벌였던 세종시 전동면 개미고개 전투 희생자를 추모하는 개미고개 추모탑

후에 미8군 사령관까지 역임한 19연대장 메로이 대령은 이 금강 방어선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경험한 바 없는 치열한 전투였다”고 술회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를 보듯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명령이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과 평소 모든 사물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자세에 더해 너무 성급하거나 조급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점검하는 습관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급한 성격으로 실패한 사례와 여유를 갖고 차곡 차곡 계획을 세워 결국 대업을 성공한 일본의 사례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통일 기반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는 평소 불같이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를 가차 없이 처단하는 기행을 저지르면서 결국 그로부터 멸시와 놀림을 당하던 가신인 아케지 미츠히데에게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성정과 예측불허의 행동을 간파하면서 평소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히데요시는 배신자 미츠히데를 제거하고 이를 계기로 순식간에 일본 천하를 손에 넣게 됩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차분하게 인내하면서 은근과 끈기로 얻은 인심을 바탕으로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등 무리수에 거리를 유지하고 내실을 기하는 등 차곡차곡 세력을 기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사후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세우는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후다닥 거리지 마라’

제 선친께서는 “우리 정환이는 다 좋은데 어떨 때는 후다닥거리는 게 흠이다” 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사 일 처리를 하면서 성급함보다는 한번 더 생각하고, 한 호흡을 한 후에 일을 처리한다면 변수와 에러를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 경찰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 ‘지구대에 흉기를 들고 들어온 괴한이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자를 들어 내리쳐서 검거했는데 이 과정에 직원이 자상을 입어 병원에 후송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저공비행으로 그 지구대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고 병원에 가서 직원을 살펴보고 상부에 보고를 마치는 등 마무리를 매끄럽게 하고 나니 그제서야 지구대장이 헐레벌떡 들어와서 “휴일이라 오랜만에 가족과 같이 나들이를 갔다 이제 왔다”며 멋쩍어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금강 방어선 전투 모습
한국전쟁 당시 금강 방어선 전투 모습

범인을 검거하고 부상 당한 직원을 병원에 후송하는 등 매뉴얼에 의한 상황처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조금 늦더라도 지구대장이 와서 처리하면 될 일을 성질 급한 과장이 먼저 출반주 해서 나섰으니 중간 생략이 된 지구대장으로서는 참 난감하고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복명복창 각답실지'(復命復唱 脚踏實地)

공직자들이 업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급한 성격이나 바쁘다는 이유 또는 업무 미숙 등으로 법령 해석을 임의적으로 해석 한다든지 규정을 벗어난 지시를 무조건 따른다든지 하는 행태로 개인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시민들로부터 질타를 당하는 것을 간간이 보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고 시행착오를 확실히 줄이기 위해서는 공직자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매사 신중한 자세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임하되, 항상 법령과 절차를 준수하는 것만이 시민들로부터 믿음을 얻는 비결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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