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고도'는 누구며 왜 기다려야 하는가"
"도대체 '고도'는 누구며 왜 기다려야 하는가"
  • 김충일
  • 승인 2024.02.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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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 품게 해
'뭐 이런 책이 다있어'로 시작해 정독하게 되는 소설, 기다림에 대한 무수한 질문 이어져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겹군”

(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대사 중에서 )

과연 자기 스스로 ‘자기 존재의 확장 가능성’을 주도면밀하게 기획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뭔가 사유하고 행동하며 시·공간을 메꿔나가는 사람보다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며 별일 이야 있겠느냐며 살아가는 이가 대부분 일게다. 하지만 한껏 자기라는 존재와 삶에 마땅치 않음과 언짢음을 느끼면서도 ’다가 올 뭔가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적지 않다. 하여 사람은 ’내가 불행한지 아닌지도 잘 알 수 없는‘ 기대감과 기다림 속에서 묘한 기쁨이라는 복잡한 느낌을 온 몸으로 껴안고 인생사를 살아낸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의 노벨 문학상 희곡작품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는 직관적으로 확 와 닿는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라며 어설프게 한 페이지씩 넘기는 순간, 어정쩡한 자세의 굽은 등을 곧추 세우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게 만든다. 베케트는 무대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을 품게 하며 아무 의미 없는 뜻 모를 무의미함과 답답함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곤 인간의 부조리, 소외, 고독이란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속 무대는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그루’ 서 있을 뿐이다. 그 곳에 구두를 벗으려고 낑낑대는 두 떠돌이 사내 에스트라공(고고)과 그의 친구 블라디미르(디디)가 실없는 수작과 부질없는 행위를 하면서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포조와 럭키라는 기이한 두 사나이가 나타나서 한데 어울리다가 사라진 후 한 소년이 나타나서 “고도씨가 오늘밤에는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말을 전하고 가 버린다. “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2막은 그 다음날이지만 제1막과 거의 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고, 마지막에 또 소년이 나타나서 같은 말을 전한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겹군”‘ 도대체 고도는 누구며 왜 기다리느냐는 무수한 물음만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정녕 고도는 누구란 말인가? 어떤 이는 고도(Godot)라는 단어가 영어의 ‘God’과 프랑스어의 같은 뜻의 말 ‘Dieu’의 합성이며, 고도는 신(神), 간절히 기다려도 오지 않는 구세주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디디는 예수의 십자가 양 옆에 매달렸던 죄수 이야기를 하거나 고도가 오면 “우리는 구제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 연극이 그리스도교와 상관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대체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면 작품에 썼지”라고 대꾸한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에게 고도는 무엇인지, 왜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고도를 찾아 나서지 않지?, 도대체 기다림은 무엇이며, 왜 기다리지? 물음의 꼬리는 이어진다. 예전처럼 공통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없는 가치 혼재의 시대. 우리는 막연히 무언가를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 속 포조가 “고도가 누구요”라고 묻자 디디는 “그냥 아는 사람이죠”라고 하고, 고고는 “아니지, 거의 모르는 사람이죠”라고 대답한다. 웃기면서도 눈물 나는 일이다. 인간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세상에 던져진 자체가 비희극인 것이다.

인간은 이리저리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지만 각자에게 고도는 신(기도), 막연한 탄원이나 족쇄, 희망, 죽음, 직장, 장차 닥쳐올 미래 등이 될 수 있다. 각자의 고도가 있으며 그 고도는 언제 올지 모른다. 혹 고도가 죽음이라 생각하는 이는 삶을 더 알차게 생각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바로 보며 지금 이 순간을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 다른 한 쪽의 ‘생각 같은 생각’은 고도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고도는 어쨌든 없어서는 안 될 ‘그 어떤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이제 계속 기다리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기에. 아니, 어쩌면 ‘고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이야기 되는 코아(core)는 ‘기다림’이다.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부조리함에도 어찌하여 계속 기다리고 있는가? 많은 고민을 심어준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오지 않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다림을 포기한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목을 매고 죽음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지 않고 그럼에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의미 없이 출근하고 밥을 먹고 퇴근하고 잠을 자는 쳇바퀴 같은 삶과 똑같다.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굉장히 비참하고 잔인한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과 대화로 비극적 의미를 희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 작품에서는 신을 찾지 마라.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도 하지 마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이는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들, 감정들, 지식들, 사람들, 나를 향해 오는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나를 만들어 나갈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발언은 ‘지금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지금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요? 지금 당신은 무엇일까요?’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순환이 가져온 사유의 흔적이다.

에스트라공을 통해 우리는 삶의 존재를 위해 뭘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인생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인가를 하면서 자기만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실존임을 말하고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 마틴 에슬린은 “우리가 쳐다보아야 하는 것은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라 ‘여기와 지금’임을 인식해야하는 삶의 태도, 달리 말하면 인생의 순간순간을 마치 그것이 유일하고도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살라는 것. 내일 온다는 어떤 것을 막연히 기다리며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책을 만지작거리며 "당신의 고도(Godot)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고도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만의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나를 넘어선 또 하나의 인간’이 된 것은 아닐까?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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