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선은 왜 공주를 비켜갔나?
철도노선은 왜 공주를 비켜갔나?
  • 송두범
  • 승인 2024.01.22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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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 경부선 노선 3차 포함됐던 공주, 최단거리 원칙으로 제외
금강교 설치 비용, 대전 기관차 차고지 이전 등의 문제로 결국 비켜나가
일제강점기 철도노선도. 검은색이 최종노선으로 다른색으로 표시된 답사노선에는 공주가 포함되어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작은 촌락에 역사(驛舍)가 건립되었고 이 역사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부터 대전은 점차 일제(日帝)식민지의 착취거점으로 발전하였으며, 1910년 시작하여 1914년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 전 구간 개통은 거대도시로의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항상 백제왕도를 상징하는 공주의 가장자리에 물러서 있던 대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부설, 충남도청 이전에 힘입은 바 크다.

공주는 조선시대 이후 호남대로 좌로와 우로가 통과하고 금강을 통한 주운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한양과 연결하며 상업적으로도 번성했던 도시였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이 이전한 것도 육로교통 및 주운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는 대륙침략 발판으로 철도 부설에 열을 올려 철도 중심의 교통망 체계를 고착하였고 도로망은 철도망을 보완하여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공주는 경부선 철도가 비켜가게 되면서 대전과 같은 도시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1892년 일본은 서울~부산간 철도건설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철도노선 조사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노선은 서울~용인~죽산~진천~청주~보은~상주~대구~밀양~삼랑진~낙동강 좌안~부산을 연결했다.

1894년 일본은 다시 한번 경부선 노선을 선정하였는데, 서울~용인~죽산~진천~청주~옥천~영동~추풍령~김천~대구~밀양~삼랑진~낙동강 좌완~하단 구덕산~부산~용두산 서쪽~일본인 거류지 해안을 연결하는 하는 노선이었다.

1899년 3차로 진행된 노선 답사에서 서울~수원~전의~공주~신교~은진~진산~금산~영동~김천~대구~현풍~창녕~밀양~삼랑진~구포~부산진~해안우회~부산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공주가 처음으로 노선에 포함된 것이었다.

경부선 3차 노선안은 기존 한국내 큰 도시를 연결한다는 점, 이후 건설될 호남선과의 연결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실제로 건설될 가능성이 높았던 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금강교량 건설 문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과 대륙연결 철도연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 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경부선 3차 노선안에 공주가 포함된 것은 공주를 통과하면 노선길이가 길어질 수는 있겠지만, 당시 공주가 상업적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얻는 경제적 이득이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1890년에 경부선 노선 조사를 다시 시행하였는데 이 노선에서도 최단 거리 원칙을 강조하면서 공주는 제외되었다. 즉, 경부선 철도 노선은 경제적 파급효과보다는 군사적인 측면을 우선하는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1904년 서오순은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부철도의 지선으로 천안 북쪽의 직산부터 강경과 군산에 이른 논선, 공주에서 목포까지 철도를 부설하면 편리하고 좋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자본을 모아 철도 부설 청원을 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인에 의한 호남선 건설에 반대하는 일본은 압박했고 결국 한국 정부는 호남철도 부설권 인가를 취소했다.

호남선 KTX 공주역사

1907년 통감부는 호남선 노선을 답사하여 조치원역~연기~공주~논산~강경~이리~김제~정읍~장성~공주~나주~함평~목포를 연결하는 노선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제는 공주 통과시 금강철교 건설에 따른 비용 및 기간 추가, 대전에 있던 기관차 차고지의 조치원 이전 등의 문제를 들어 대전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1910년에 대전 분기 호남선 공사를 시작하였다.

경부선과 호남선 모두 공주를 비켜가면서 공주는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고 충남도청의 대전이전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 것이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 부설 이후 대전과 조치원의 발전을 목도한 공주의 철도 유치 의지는 공주 유지들을 중심으로 한 철도유치 행동으로 연결되었다. 1916년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가 공주~충주간 노선 부설, 1921년 조치원~공주를 연결하는 협궤동차 부설, 1923년 조치원~공주~대천(서천)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제안하였다.

이는 조치원과 서천의 판교를 연결하는 조판선(鳥板線) 부설 논의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1892년 이후 공주에 철도노선 통과 계획과 유치, 건설노력은 실패했다. 그러다 2015년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에 호남고속철도 KTX 정차역이 들어섰다. 공주역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위치이기도 하지만, 경부선 개통 후 110년, 호남선 개통 후 100년이 지난 너무 늦은 공주역의 설치였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전 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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