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대중은 줏대가 없고 나약한 존재"
"일반 대중은 줏대가 없고 나약한 존재"
  • 임영호
  • 승인 2013.09.02 0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마키아벨리...'군주론'은 자기 이력서

   마키아 벨리
마키아벨리(NiccoloMachiavelli, 1469~1527)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알려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이중전략의 미덕을 찬양하고, 독재자를 위한 지침서를 쓴 사악한 정치이론가로 평가한다. 한마디로 공공의 적이다. 오죽하면 영어사전에 마키아벨리안(Machiavellian)이라는 형용사가 등장하여 ‘통치술 전반에서 권모술수를 부리는’ 이라는 의미로 쓰이겠나?

그는 출신이 미천하고 아버지는 세금 체납자로 그 아들은 피렌체 공직자 윤리법상 공직취임이 공식적으로는 안 되는 그런 자였다. 돈이 없어 책을 사보지도 못할 만큼 가난했으며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남들처럼 변호사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1498년, 약관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1512년 스페인의 공격에 의하여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메디치가 정부아래에서 고문과 투옥, 연금 끝에 메디치가의 죠바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 세로 즉위하자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되자마자 낙심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메디치 정부의 군주정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군주론》을 써서 메디치가의 수장 로렌쵸 데 메디치에게 바친다.

《군주론》은 재취업을 위한 자기 이력서이다.
《군주론》은 해직당한 자신을 메디치 가문이 다시 불러주기를 바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쓴 피눈물 나는 자기 추천서이며 이력서이다. 결코 정치이론서나 처세술에 대한 책이 아니다. 공화정 붕괴 후 혼란의 소용들이 속의 신생 군주국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유럽 각국 통치자들과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교황들과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며 10여 년 간 정권을 운용해보았던 노련한 정치가이며 각국의 통치자들과 능수능란하게 협상을 펼칠 수 있는 경험 많은 외교관이다. “제발, 저를 다시 불러 주시오” 라고 이 책을 통하여 애절하게 호소한다.

현안 해결위해 고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
마키아벨리는 인문학자이다. 복잡한 이탈리아정세를 헤쳐 나갈 군주의 덕목을 파헤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인용한다.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고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프랑스 출장 시 카이사르의《갈리아전기》, 체사레 보르자와 협상할 때 푸르타쿠스의 《영웅전》, 율리우스 2세를 만날 때 리비우스의《로마사》,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과 협상 시 타키투스의《역사》《게르마니아》를 읽고 지혜를 구했다.

마키아벨리는 아버지의 영향도 받았다. 아버지베르나르도가 소장하고 싶은 리비우스의《로마사》을 얻기 위하여 아들 마키아벨리를 심부름시켜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으로 샀다.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인연으로 세상의 이치와 권력의 속성을 다룬 《로마사논고》를 썼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현실주의이다.
이전의 도덕철학자들이나 정치철학자들은 전적으로 가상의 공화국이나 군주국에서만 논의 했을 뿐이고 군주가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의 세계에 관하여 아무런 지침도 제공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고전에서 얻은 지혜와 타고난 재능으로 주변 환경과 인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특징과 대세의 흐름을 분석하였다.

피렌체 공화정이 들어 서기전 신정정치를 편 이상주의자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가 망한 이유는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장을 한 예언자는 승리를 차지 할 수 있으나, 말뿐인 예언자는 멸망하고 만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보나롤라의 실책이 아니라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라 했다. 시민들은 포퓰리스트나 이상주의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기 때문에 인기를 끌게 된다. 이때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지으면 집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와 정치현실은 함께 오래가지 못한다. 위기로 점철된 현실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적 판단이 이상주의로 집권한 포퓰리스트를 한줌의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이상주의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한다.

일반대중은 늘 줏대가 없고 나약한 존재이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대중의 모습은 얼빠진 짐승이고 우리에 갇혀있는 노예에 불과했다. 늘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고, 힘을 가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나약한 존재였다. 메디치 가문이 집권할 때 경제활동이 최고 수준으로 높았고 르네상스를 일으킬 때는 메디치가를 찬양했으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프랑스의 침략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메디치 가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 혼란기에 사보나롤라가 하느님의 심판 운운하며 등장하자 이번엔 거기에 빠져 중세시대 암흑기로 돌아갔으며 이것도 잠시 4년 후에는 불태워 죽였다. 마키아벨리는 일반대중이란 이렇게 늘 줏대가 없고 자기이익을 위하여 조변석개하며, 겁을 주면 따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혹평을 퍼부었다. 따라서 대중은 권력을 가진 강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며 이런 나약한 대중은 강경한 자세로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잔혹함과 은혜로 적절히 배합하여 통치하라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나약한 본성을 까발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을 통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더 지독한 악명을 얻게 된다. 그는 기원전 3세기 인물인 시칠리아 사라쿠사의 독재자 아카토클레스를 사례로 들며 잔혹함과 은혜를 적절히 베푸는 것, 이른바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합하여 통치하라고 한다. 먼저 대중들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 군주의 통제력을 확립한 다음 그 다음 부터는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책을 편다. 대중들은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로부터 오히려 은혜를 입게 되면 보통 때 은혜를 받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대중은 늘 왜 소수의 지배자에게 당하는가?
마키아벨리는 그들은 울보이기 때문에 늘 당하며, 쉽게 분노하면서 이성을 잃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대중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전부 사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울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자. 역사는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스스로 내린 대답은 동일했다. 지배를 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 반면, 지배를 받는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가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군사적 취약성으로 망했다
이탈리아 작은 국가들은 자국의 군대를 갖지 못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군대를 두면 항시 쿠데타 가능성이 있기에 용병으로 국방을 해결하였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몸값에만 신경 쓰지 막상 전투현장에서는 몸을 사리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비즈니스 차원의 돈벌이 입장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것이 용병제도의 한계이다.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는 꼴이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대를 양성함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나쁜 지도자는 결정을 못하는 사람이다.
마키아벨리는 100% 확실한 해결책이 없을 때는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약자의 위치에 있다면 시간 끌기는 더욱 효과적이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특히 당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더욱 단호하고 과감하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마키아벨리는 강자인 루이12세가 우유부단함으로 이탈리아전체를 차지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했다. 가장 나쁜 지도자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군주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군주론에 소개된 자중 이탈리아 영웅으로 이상적인 군주로 소개된 자는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이다.

   군주론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비장한 면을 그를 통하여 알게 된다. 지도자는 때로 냉혹해져야 하며, 권모술수로 자신의 의도를 위장할 수도 있어야 한다.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희생은 감수하여야한다. 무슨 일이든지 선을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들 속에서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잔인하다는 악평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는 인간들을 무력으로라도 통제하는 것이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지름길이다. 그래야 군주는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운명의 힘에 끌려 노예처럼 살수는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영웅 체사레 보르자(Cesare-Borgia)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마다 그 현장에 있던 마키아벨리는 포르튜나(행운)의 무서운 저력을 발견한다. 그는《군주론》 끝부분에서 원래 세상일이란 포르튜나와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쓴다고 해도 이세상의 진로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록 포르튜나가 운명의 절반을 결정한다 해도 적어도 나머지 반은 우리 자신의 지배, 우리들 각자의 비루투스 (virtus, 개인적 역량)에 달려있다. 어차피 포르튜나의 힘에 의하여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탁월함과 용기 즉 비루튜스를 발휘하여 한번 붙어보라는 것이다. 성공할 확률은 50%이다. 그냥 앉아서 운명의 힘에 끌려 노예처럼 살수는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거칠고 대담하게 운명에게 도전하라는 것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며 주저 없이 운명과 맞서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던 카이샤르 모습에서 마키아벨리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본다.

대업을 이루고 싶은 리더는 괴물이 되어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색한 지도자가 탁월한 지도자라 한다. 율리시스2세의 변신을 관찰하면서 관대함이란 지도자가 되기 전에 취할 태도일 뿐이며 막상 군주와 같은 리더의 반열에 오르면 인색함으로 조직을 쥐어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운 존재로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율리우스 2세의 《모세상》의 머리끝에는 뿔을 달아 놓았다. 대업을 이루고 싶은 리더는 머리에 뿔이 달려야한다. 괴물이 되어야 한다. 인색한 모습을 보여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대충해도 내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환상에 젖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직의 고삐를 다 잡어야 한다.

탁월한 팔로워 없는 사회에 나쁜 리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탁월한 리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의 평민들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지만 마치 경기장이나 극장에서 어떤 볼거리를 요구 하듯이 입장을 바꾸면서 거침없는 갈채를 보내거나 무의미한 열정으로 아첨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키투스는 탁월한 리더가 없던 로마의 위기를 탁월한 팔로워(follower)의 부재로 설명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입장을 바꾸는 로마 평민들의 잘못된 선택이 나쁜 리더에게 권력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탁월한 팔로워가 없는 사회에 나쁜 리더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동기에 자극될 뿐 공적인 영예를 생각하지 않았던 나쁜 팔로워가 문제였다. 리더가 우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것 이라는 잘못된 노예근성이 우리를 나쁜 팔로워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나쁜 리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독창성은 뒤집어 읽기에 있다.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은 고대와 중세의 정치철학 입장과 명백한 단절의 선을 그은 책은 아니다. 플라톤의「국가」에서도 조국의 수호자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제시 되어 있다. 마키아벨리의 독창성은 뒤집어 읽기의 통찰력에 있다. 특히 무엇보다「군주론」의 핵심내용은 키케로의「도덕적 의무론」에 대한 뒤집어 읽기이다. 키케로는 군주가 자애로운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이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대답을 제시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만 두려움의 마음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사람에 의해 그 정도와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군주는 권력의 확실한 장악을 위해 늘 두려움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군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백성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케로는「도덕적 의무론」에서 사자와 여우로 비유하여 불의를 설명했다. 기만은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마치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불의 중에서도 남을 가장 많이 기만하면서도 자신을 마치 선인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면서 속이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완전히 키케로의 말을 뒤집는다. 군주는 사자처럼 사나울 뿐만 아니라 여우처럼 교활하여야한다. 군주는 여우처럼 능숙하게 분장할 줄 알아야 하며 감쪽같이 위장도 해야 하고 때로는 뻔뻔스러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생의에 목표를 수정하다.
군주론이 탈고된 지 2년쯤 되었을 때인 1513년 말경, 로렌츠 데 메디치(1492-1519)를 알현하고 직접 《군주론》을 헌정하였다. 그러나 헌정식에 참여했던 다른 한사람이 사냥개 한 마리를 선물로 바쳤는데 로렌츠는 사냥개만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에게 모욕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목표를 수정하였다. 자기 손으로 시대의 영웅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마키아벨리가 생의 후반에 바쳤던 것은 루첼라이 정원의 공부모임이다. 그는 피렌체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들과《로마사》공부를 시작했다. 이것은 플라톤 아카데미의 정신을 계승한 피렌체 지성인들의 학술친목 단체였다. 그리고 《로마사논고》라는 새로운 집필 프로젝트를 생각해낸다. 마키아벨리가《로마사논고》를 쓴 목적은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로마사논고》는 강자의 논리를 뒤집는 책이기 때문에 혁명의 지침서라 해도 좋다. 강자의 횡포를 이겨내고 공화정의 이상을 지상에서 실현했던 로마의 역사를 모범으로 삼고 그 선례를 따르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군주론》에 등장하는 여우처럼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본인의 심증을 그대로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피렌체가 다시 강대국으로 탄생하려면 고대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만약 강자의 횡포에 억눌려 살던 삶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면 위대했던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외쳤다.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 고전의 지혜로 빠져라. 리비우스의《로마사》를 펼치시라. 그러면 당신들은 더 이상 메디치와 같은 강자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를 얻게 된다. 참된 공부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지다.

강자에 대한 견제수단이 있어야한다.
마키아벨리는 욕망에 따라 무분별하게 행동하면 반드시 처벌받게 된다는 견제의식을 심어 주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강자는 적극적으로 감시되어야 하며 그 권한이 도에 지나칠 경우 그것을 견제하는 제도가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베칠리우스 산에 올라가 파업을 일으키면서 10인회에 대항했던 로마의 평민을 비판했다. 약자는 강자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말로 호소하지 말고 그들의 세력과 권위를 압도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메디치가 가문
코미디 작가로 변신하다.
마키아벨리는 1519년부터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공직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전문 작가로 밥벌이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코미디 작가로 변신한 것이다. 생전에 최고의 히트작은《군주론》이나 《로마사논고》가 아니다. 16세기 이탈리아를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만드라골라》《클리지아》였다. 그는 전문 코미디 작가로 대박을 터뜨렸다. 강자와 지배자들은 잘 웃지 않는다. 웃음은 약자들의 보편적인 무기이다. 마키아벨리는 약자들을 응원하기 위하여 코미디를 썼다. 웃음과 풍자로 강자에게 대항한 것이다.

그는 이제 완전히 패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생의 말년에 다시 메디치 가문과 뒤엉키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메디치 가문출신의 두 번째 교황이었던 클라멘트 7세가 마키아벨리에게《피렌체사》의 집필을 의뢰한다. 정치가 아니라 전문작가로서 말이다. 이것은 작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클레멘트 7세에게《피렌체사》를 헌정하기 위하여 로마에 간 마키아벨리에게 들려온 소식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왕 카를 5세가 교황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교황의 자문관들은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알고 마키아벨리를 시켜서 난국을 해결하여야 된다고 조언했으나 교황은 아직도 완전히 신임하지 않았다. 단지 트렌치스코 귀차르디니 총독의 개인 자문관으로 임명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침략군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제안을 했으나 묵살 당했다. 적이 로마 코앞에 다가오자 그제야 마지막 카드로 마키아벨리를 5인 성벽 관리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1527년 5월 26일 로마는 함락되었고 메디치가문은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패자가 되었다. 피렌체의 공직에 겨우 복직하였는데 그 공직을 맡겼던 피렌체 가문은 축출되고 다시 공화정 정부가 들어섰다. 이제는 메디치 가문의 부름에 응했다는 이유로 공화국의 배신자로 낙인 찍혀버린 것이다. 그는 패잔병의 모습으로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음의 병이 깊었던지 고향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1527년 6월 21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마키아벨리”
이 책을 덮으며 저자의 말대로 내가 마키아벨리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다. 아마 억울하여 울고 싶었을 게다. “미안합니다.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를 새롭게 이해시킨 이 책의 저자 김 상근 교수 에게 감사를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드린다. 그는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에게 권모술수를 가르친 음흉한 참모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나는 이제야 말한다.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정말로 열심히 산 사람이다. 관료로써 학자로써 문필가로써 최선을 다해 산 사람이다. 착한 심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이었다. 르네상스 정신의 근본이 살아 숨 쉬는 인문학을 알고 이해한 탁월한 학자였다. 그리고 “울지 마라.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약자를 보담아준 수호성인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