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이 소용돌이 치면 흐르는 '용댕이', "맑은 강물은 아름다웠다"
용대청천(龍臺晴川)은 세종시 연동면 명학2리 용댕이 산자락의 기암괴석과 그 바위 아래에 흐르던 맑은 강물을 노래한 것이다.
용댕이산은 연동면의 남동단에 치우쳐 있다. 부강면과 경계를 이루는 백천(白川)과 금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작은 산으로 해발 97m에 불과하다.
옛날에 부강면 금호리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던 금강이 이 산모퉁이에 부딪혀 소용돌이가 생기면서 형성된 깊은 호소(湖沼)를 용댕이(龍塘, 용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호소 위에 우뚝 선 기암괴석이 물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를 용대(龍臺)라고 했던 모양이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사시사철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부강에서 상업으로 부를 이룬 김학현이라는 분이 선친을 사모하여 1930년 무렵 용대 위에 터를 닦고 원모정(遠慕亭)이라는 정자를 지은 후로는 시인·묵객뿐만 아니라 주변 학교에서 봄·가을에 소풍하는 명소이기도 하였다. 원모정은 김학현의 가세가 기울면서 1960년대 초반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가 없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용당(龍塘)은 그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차례 대홍수를 만나면서 물줄기가 바뀌고 점차 모래가 쌓이는 바람에 지금은 용당의 위치를 비정하기조차 어렵다.
용대였을 것으로 보이는 바위들이 있으나 자전거 도로(데크)가 그 허리를 차고 지나가고 있어 옛 풍경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용당기암(龍塘奇巖)을 노래한 한시는 1934년 발간된 연기지(燕岐誌)에 3수가 남아 있다. 당시 연기군의 8곳 명소에 대한 한시를 모집하였는데 전국에서 수백 편이 응모되었다.
경치마다 빼어나게 잘 지은 한시를 3수씩 총 24수를 선정하여 연기지에 수록해 놓은 것인데 그중에 용당기암에 대한 3수가 남아있어 사라진 명소를 보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용댕이는 나루터로도 유명했다. 구들기 나루(부강장)와 빙이나루(부용리), 골뱅이 나루(합강리)를 연결하던 뱃턱으로 연동면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교통의 요지였다. 1970년대까지 나룻배가 오갔으나 1980년대 들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으니 세월의 무상함이 이와 같은 것인가?
검푸른 강물이 유유히 굽이쳐 흐르던 용당과 그 위에 우뚝 선 용대바위, 그리고 부강 장터가 있는 구들기 나루를 향해 한가로이 떠가던 나룻배를 상상하며 이 시를 감상해 본다.
청천직하산제주(晴川直下散諸州, 맑은 강물 아래쪽엔 여러 고을 여기저기)
하일신룡대외유(何日神龍臺外遊, 신룡은 어느 시절 용대 밖을 노닐까)
재상수능부자계(在上誰能夫子繼, 그 위에 서 있는 이, 공자님 계승할 듯)
과전자소백순수(過前自少伯淳酬, 강 앞에서 청년 백순의 시에 화답하네)
담운명월연천리(淡雲明月連千里, 옅은 구름 밝은 달 천 리에 이어질 때)
욕로범구도기추(浴鷺泛鷗度幾秋, 물질하는 백로야! 물 뜬 갈매기야! 몇 살이나 되었느냐?)
나상편의주즙용(那上偏宜舟楫用, 그 강 한쪽에서 노 젓는 배가)
만인통섭일무우(萬人通涉一無憂, 만 사람 건네주니 걱정 하나 없어라.)
1, 2절 용당과 용대를 노래했다. 용당의 맑은 물을 청천(晴川)이라고 읊었다. 작가는 용당 깊은 물에 영험한 용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그 용이 물에서 나와 기암괴석인 용대 위에서 노닐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3, 4절 작가는 지금 용대 위에 서서 금강을 바라보며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 자 백순 伯淳)를 떠 올린 듯하다. 그리고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정호처럼 자신도 공자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내비쳤다.
정호가 읊은 춘일우성(春日偶成)은 봄날 풍경을 그린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일부를 소개하면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옅은 구름 떠가고 실바람 부는 점심 무렵)
방화수류과전천(芳花隨柳過前川, 흐드러진 꽃잎과 버들 쫓아 개울을 건너고파)
라는 내용이다. 작가는 정호가 젊은 시절 읊었던 이 시에 답(酬)하고픈 심정임을 밝히고 있다.
정호가 지은 이 시의 두 구절은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목을 풀려고 부르는 운담풍경(雲淡風輕)이라는 단가(短歌)의 첫 부분에도 등장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유명한 구절이다.
5절, 6절 강물과 맞닿은 하늘, 그리고 강변의 한가로운 풍경을 그렸다. 하늘의 옅은 구름과 달을 배경 삼아 강에서 한가로이 물속을 헤집는 백로와 물 위를 유유히 떠도는 갈매기에게 몇 살이나 되었냐며 묻는 모습에서 자연에 동화된 작가의 시상을 읽을 수 있다.
7절, 8절
나상(那上)은 ‘거기, 그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사람을 태운 나룻배에서 사공이 노를 저으며 유유히 강을 건너는 느긋한 모습에서 강변의 한가함이 연상된다.
끝으로 맹의섭 선생이 저술한 추운실기(1972년 발간)에 연기팔경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용당기암(龍塘奇巖)>에 대한 내용을 전재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용당은 동면 명학리에 있는 깊은 웅덩이로서 금강물이 이곳에서 휘돌아 간다. 그 주변에 있는 바위가 그야말로 기암인데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태를 갖추고 있다. 병오년(1906년 추정) 대홍수 전에는 용당 동북안에 부강장이 있었는데, 충남·북 일대에서 운반한 해륙물산을 가득 실은 배들이 숲을 이루듯 정박하던 곳이었다.
탁류에 휩쓸린 부강장은 물길이 바뀌는 바람에 그 위치를 옮겼으나 용당은 변함이 없었다. 철도가 개통된 이후 하상 변화로 물건을 운반하던 큰 배의 운항이 불가하나 고기잡이배와 놀이배는 사철 볼 수 있다.
층암절벽에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녹음방초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 겨울에는 눈 덮인 소나무가 독야청청하는 경치가 시인·묵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위 정상에 부강의 부자 김학현 씨가 평양의 부벽루 못지않은 원모정을 건립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가 반곡리에 살았던 1960년대, 부강역으로 석탄 기차를 타러 가거나 부강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온 적이 있습니다.
골뱅이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황우재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 때는 용당기암을 몰랐습니다.
태양12경 한시를 읽고서야 사연이 많은 이름난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석탄 기차로 여행한 추억이 새롭고 그 시절 인정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그런 명소가 없어졌으니 아쉽습니다.